열녀 오씨 박성림처(열녀오씨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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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씨(吳氏), 박성림(朴成林) 처.
소재지 :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
규격(cm) : 높이 81 너비 39 두께 15.5
정려(복호)연도 : 1900년(광무 4)
건립연도 : 1941년 4월 10일
비문(전면) : 烈女吳氏之門
비문(후면) : 此和順人吳氏之烈也 天資仁貞 幼有閨模 入嫁于密陽人朴成林家 未久而喪其所天 永絶水穀期欲下從 舅姑勉强曰 於夫爲烈於親喪孝 豈其倫理乎 難遠舅命 無逢朔望必奠新衣 ■往墓所血淚不絶 事親至孝 鄕黨稱其孝烈兼全焉 故有儒狀及牧使完文 察理使完文 幷太極敎三綱風化錄 而 高宗庚子九月日特蒙朝家下賜米肉之厚恩 尙未得盛典旌表之揚而爲其子孫者 不可泯默先蹟 故今玆猥建短碣焉 昭和十六年辛巳四月十日
비문(우측면) : 子 南九 孫 4명, 曾孫 ■명.
비문(후면) 해석 : 여기는 본관이 화순인 오씨의 열녀문이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곧아 어릴 적부터 규수의 모범이 되었다. 본관이 밀양인 박성림에게 시집갔으나 오래지 않아 남편이 죽자 오씨는 식음을 영원히 끊고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다. 이에 시부모가 강하게 만류하며 이르기를, “남편에게는 열녀가 되지만 부모에게는 효도가 아니니 어찌 윤리라 하겠는가?”하였다. 시아버지의 말을 어길 수 없어서 이후로는 초하루 보름날에는 만날 수가 없는데도 반드시 새 옷을 갈아입고 제사를 지내고 자주 남편 산소에 가서 피눈물을 흘리며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며 효도를 다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 효성과 정절을 겸하였다고 칭찬하였다. 이 때문에 유림의 추천과 제주목사와 찰리사의 완문, 태극교(太極敎)의 삼강풍화록(三綱風化錄)을 근거로 1900년(광무 4) 9월에 특별히 조정에서 내리는 쌀과 고기를 받는 두터운 은총까지 입었다. 그러나 아직 큰 법으로 정려로 표창 받지 못하였으므로 자손 된 사람으로서 그 효행 사실이 끊어질 수 없다하여 지금 이에 외람되이 조그만 비석을 세웠다. 소화 16년 신사(1941) 4월 10일 (건립)
비문(우측면) 해석 : 아들 남구, 손자 4명, 증손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