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일보] [창간 특집] 제주4·3의 기억...한라산에서 발굴하다
- 202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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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통일의 길 마중물, 8년간 312회 한라산 탐사
격전지에서 탄피·수류탄 등 유물·유품 2790점 발굴
피난민들 밥줄인 놋숟가락도…산에서 급박한 상황 발생
2025. 9. 27. 제주일보(좌동철 기자)

제주시 봉개동 한라산 중턱에 있는 물장오리오름 전투현장에 발견된 탄피들.
제주4·3에서 한라산은 삶과 죽음이 교차했다. 무장대와 피난민은 숨어들었고, 토벌대는 쫓아내려고 했다.
본지는 창간 80주년을 맞아 한라산에 묻힌 4·3의 역사를 발굴하기 위해 산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한라산은 제주4·3의 시작이자 끝이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홧불이 오르면서 4·3은 시작됐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됐다.
2만5000~3만명의 도민들이 희생된 가운데 7년 7개월 만에 제주4·3은 막을 내렸다.
‘4·3통일의 길 마중물’을 설립한 배기철 조사단장은 2017년 10월 한라산에 올랐다.
지난 8년 동안 312차례 산을 찾았다. 60명의 회원과 대학생, 문인, 주부 등 각계각층에서 연인원 1735명이 발굴작업에 참여했다.
산에서 나온 유적과 유물·유품은 2790점에 달했다.
유적은 생활흔적(동굴·집터), 토벌대 주둔소, 무장대 근거지, 전투지를 찾아냈다. 유물은 무기류(탄환·포탄·수류탄·철창), 작업도구류(낫·골갱이·도끼 등), 생활도구류(놋숟가락·솥·옹기 등)로 구분했다.
배기철 단장은 “놋쇠 숟가락이 나올 때는 마음이 아린다”며 “얼마나 급박했으면 생존에 필요한 밥줄인 수저까지 떨어뜨렸을까라는 생각이 밀려온다”고 했다.
무장대와 토벌대는 한라산에서 여러 차례 격전을 벌였다. 1949년 3월 9일 애월읍 노로오름의 작은 하천에서 벌어진 ‘산물내 전투’는 치열했다. 현장에서 M1탄피와 탄환 클립, 50㎜ 박격포 불발탄, 매복 흔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배 단장에 따르면 전투 현장에서 군경 토벌대 측에서는 미군이 제공한 카빈·M1 탄피가, 무장대쪽은 일본군이 남기고 간 제식소총인 38식·99식 탄피가 발굴됐다. 특히 무장대가 머물던 곳은 대부분 철창이 나왔다.
고영구 단원은 “양측 탄피와 탄두가 나온 거리를 재보면 불과 10m 간격의 전투현장도 있었다. 무장대는 한라산 밀림에 매복했다가 바로 코앞까지 토벌대가 오면 총을 쏘았다”며 “먼 거리에서 쏠 정도로 총알이 넉넉하지 않았다. 탄알이 부족했고 총보다 철창이 더 많아서 근접 전투를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노로오름 분화구에서 발견된 미 육군 정복 단추

피난민이 한라산에 남기고 간 솥과 그릇 파편 등 각종 생활도구들.
4·3 발발 후 7개월이 지난 1948년 10월 17일 ‘해안선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한다’는 포고문 발표에 이어 강경 진압작전(소개령)이 전개됐다. 그해 11월 17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내려왔지만,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입산자가 있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돼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이 자행됐다. 온 가족이 살기 위해 다시 한라산으로 숨어들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공작을 병행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국가 공권력은 한라산에 피신한 도민들이 귀순하면 과거의 행적을 묻지 않고 모두 살려주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다. 무장대를 체포하고, 2만명 가량의 피난민을 하산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 때 많은 피난민들이 하산했다. 그러나 선무공작 방침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1600여 명이 총살당하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다.
배 단장은 “한라산은 피난민의 삶의 터전이었다”며 “당시 사살되거나 생포된 사람 중에 피신한 주민들도 많을 것으로 보이는데, 흙을 파서 나뭇가지와 억새를 덮은 집터와 무쇠솥, 깨진 옹기 조각, 숟가락, 골갱이가 이를 증명한다”고 했다.
그는 여러 증언과 기록을 보고 한라산에 올랐지만, 증언과 현장이 일치하지 않아서 2021년에는 금속탐지기와 금속물체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는 핀포인트 탐지기를 동원했다.
체계적인 현장조사로 노로오름 분화구인 일명 ‘장태코’에서 미 육군 정복 단추를 발견했다.
한라산 깊은 숲에 떨어진 미군 단추는 미군정시기 미군이 토벌대와 함께 작전에 참여했거나, 토벌이 끝난 후 조사 차 갔다가 현장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3통일의 길 마중물’ 회원들의 현장조사와 발굴은 ▲노로오름 ▲한대오름 ▲돌오름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카카오제주 챌린지 지원사업 선정돼 오는 11월에는 온라인 아카이브 전시를 기획 중이다.
많은 유물과 유품은 항온항습 기능이 있는 전시실이 없어서 대부분 발굴 장소에 다시 묻은 후 포인트로 체크해 놓았다. 4·3아카이브 기록관이 설립되면 이곳에 전시·보전돼 미래 세대들도 4·3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배 단장은 “피난민의 증언을 들어보면 추운 것은 견딜만한데, 배고픈 것은 견딜 수 없었다고 합니다. 숟가락을 챙기지 못하고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든 것을 보면 한라산에서 수시로 격전이 벌이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10년이면 조사가 끝날 줄 알았는데, 8년이 지난 현재 절반도 이루지 못했다. 한라산에서 4·3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해 먼 훗날에도 4·3이 기억될 수 있도록 매주 일요일마다 산에 오르겠다”고 말을 맺었다.

군 토벌대가 사용한 수류탄.

한라산 밀림에 속에서 발굴된 놋숟가락과 놋그릇

배기철 조사단장이 금속탐지기를 이용해 유품을 찾고 있다.

단원들이 궤(천연동굴)에서 유물을 조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