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소리] 조선에 ‘갓’이 있었다면, 최남단 제주엔 ‘정동벌립’이 있다!
- 202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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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쓰다] ③ 제주도 무형유산 정동벌립장 홍양숙-송월순 보유자
제주인 생활 필수품이었던 정동벌립, 대를 이어 전해지는 제주의 문화
2025. 10. 9. 제주의소리(김찬우 기자)
정동말총벌립. 46x46x15.3cm. 정동줄기와 말총으로 만든 정동말총벌립. 이 작품은 홍양숙 보유자가 14개월에 걸쳐 만든 벌립이다. ⓒ제주의소리
“제주도 사람들은 말의 털로 만든 모자를 쓴다. 이것은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풍습이다. 또 풀로 만든 모자도 쓴다. 이 또한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풍습이다.”
제주 고유 모자인 털벌립과 정동벌립을 본 일본인 문화인류학자가 1910년대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정동벌립은 한라산 중산간에서 자생하는 정동(댕댕이덩굴)을 캐와 잎과 눈을 훑은 뒤 잘 말려 정성껏 엮은 모자다. 제주에서는 갓 대신 정동벌립을 많이 쓴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정동벌립은 비와 햇빛을 막아주면서도 통기성이 좋아 농부나 테우리(목동)들이 즐겨 찾던 모자였다. 눈이나 비오는 날은 물론 더운 날 야외 작업할 때도 꼭 빠지지 않았다.
‘정동벌립’은 삶과 같은 존재였다. 먹고 사는 일에 빠짐없이 등장했던 모자였다. 갓처럼 쓰고 다녀 ‘정동갓’이라고 부를 만큼 조선에 ‘갓’이 있었다면 제주에는 ‘정동벌립’이 있었다.
이에 제주특별자치도는 1986년 4월 정동벌립(정동벌립장)을 도 무형유산으로 지정하고 초대 보유자에 1910년생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 홍만년 어르신의 이름을 올렸다.
이후 사촌 동생인 홍달표(94) 선생이 2대가 됐고 큰아버지였던 초대 보유자에게 사사받은 홍양숙(64)씨가 3대 보유자가 됐다. 초대 보유자의 조카 며느리인 송월순(73)씨도 보유자다.
[제주의소리]는 추석을 맞아 제주 전통 모자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정동벌립’의 명맥을 되살려가는 무형유산 기능보유자 홍양숙, 송월순 보유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열일곱에 만난 ‘정동벌립’…“아버지, 저도 좀 해보면 안 되쿠과”
3대 정동벌립장 기능보유자 홍양숙 씨. 그는 1977년 열일곱의 나이로 큰 아버지인 초대 보유자 홍만년에게 사사받아 지금까지 정동벌립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제주의소리
홍씨가 짠 정동벌립(사진 오른쪽). 그는 2016년 사단법인 대한민국명인회장으로부터 정동공예 분야 대한명인으로 인정받았다. ⓒ제주의소리
홍양숙 보유자는 1977년 열일곱 나이로 정동모자 짜는 일을 시작하게 됐다. 청소년 시절 큰 병을 앓아 문밖을 나가기 힘들 때 집 근처 모자를 짜던 큰아버지 홍만년 어르신 댁에 놀러 가 정동 줄기를 자주 만졌던 그였다. 큰아버지는 일찍 여읜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초가지붕에 얹은 정동 줄기가 초록빛에서 갈색으로 아름답게 마르는 모습을 본 홍양숙은 그렇게 “저도 좀 해보문 안 되쿠과”라고 말했고 “해보라”는 큰아버지 말씀에 정동모자를 짜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했지만, 잡념은 사라지고 몸도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어머니도 딸의 건강이 염려돼 모자를 모두 불태우기까지 하며 반대했지만, 되려 정동벌립을 짜면서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고 직접 최상급 재료를 구해다 주기도 했다. 홍씨는 “나 때문에 어머니 무릎이 성한 날이 없으셨다.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다.
홍씨의 어머니는 정동을 짜는 딸의 손이 아플까봐 가늘고 질 좋은 정동 줄기만 걷어왔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트럭에 올라타 애월읍은 물론 대천동, 한경, 안덕 등 중산간 곳곳에서 정동 줄기를 걷어와 딸에게 건넸다. 어머니의 정성은 그대로 홍씨의 성장 발판이 됐다.
# 민속박물관서 보고 뜬 정동벌립, 제주 역사 잇는 첫걸음
어느날 제주민속박물관을 찾은 홍씨는 유리관 속 ‘정동벌립’을 보고 모양과 짜임새를 꼼꼼히 글로 적고 눈으로 보며 익혔다. 틈날 때마다 자주 찾아 보고 따라서 만들어보기도 했다. 당시엔 정동벌립 대신 기념품 판매를 위한 개량형 정동모자를 짜던 시절이었다.
이윽고 박물관 전시품과 똑같은 정동벌립을 짜는데 성공한 홍씨는 곧바로 큰아버지께 가져갔고 “이걸 어떵 짜져냐? 어디서 봔 짠거니. 니 같이 솜씨 좋은 아이는 처음 봠져!”라는 칭찬을 들었다. 큰아버지는 오래전 정동벌립을 만들었지만, 수요가 줄어 만들지 않아 왔다.
가르쳐줄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조카가 알아서 배워 만들어 온 것이다. 이에 홍씨는 갓처럼 쓰고 다니기도 해서 ‘정동갓’으로 불렸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제작 기법을 섬세히 배울 수 있었다. 정동벌립과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 정동벌립을 처음 짜기 시작한 홍양숙 보유자의 과거 모습. ⓒ제주의소리
홍양숙 보유자가 정동줄기를 재배, 수확하고 있는 모습. ⓒ제주의소리
홍씨는 정동벌립이 1986년 도 지정 무형유산으로 지정될 당시 심사 작품을 제출하기도 했다. 연로하셔 몸이 약한 큰아버지 대신 정동벌립 3개를 제출했는데 심사를 통과하게 된 것이다.
이에 큰아버지가 보유자로 이름을 올리라고 했지만 그는 “가르쳐주지 않았으면 만들 수 없었다”고 사양했고 그렇게 홍만년 어르신이 초대 보유자가 됐다. 앞서 1980년 초 제주관광공모전에도 출품해 우수상을 받고 각종 언론은 물론 국회의원의 관심도 받았다.
“다음엔 니가 잘 받앙 잘 이어가라. 세상이 좋아져 가난 옛날 것도 잊지 안해영 문화재로 지정해주곡. 니가 큰 일 했져. 니가 안 해시문 모를 건디, 끊어지던 끈을 니가 이어가기 맨들었져. 착허다.” 큰아버지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 정동 공예가 좋아 바친 평생 “앞으로도 널리 알리겠다”
홍씨는 “정동 공예가 좋아서 한결같은 마음과 자세로 평생을 바쳤다. 일이 좋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며 “조상들이 들에서 자라는 보잘것없는 풀줄기를 가지고 이렇게 훌륭한 생활 도구를 만드신 그 지혜로움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2006년 정동 공예 ‘대한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 정동벌립의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 재료인 정동 줄기도 직접 재배 중이다. 중산간 개발 여파로 이제는 자연에서 정동을 구하기 어려운 형편인 것이다. 이에 2008년부터 시범 재배를 시작했고 지금도 노력 중이다.
홍씨는 “자연 생명과 사람의 지혜가 담긴 소중함을 늘 기억하며 오롯이 지켜나가고 싶은 마음 뿐”이라며 “조상님이 남긴 전통과 맥을 온전히 지키고 제대로 이어받아 후손에게 물려줄 생각이다. 지금도 며느리가 이수자로 지정돼 정동벌립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 먹고 살기 위해 짠 정동벌립 “귀덕리(잣질)는 정동 동네”
3대 정동벌립장 기능보유자 송월순 씨. 그는 한림에서 정동벌립을 짜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제주의소리
송씨가 선대 보유자들로부터 물려받은 공예 도구들. ⓒ제주의소리
홍씨와 함께 정동벌립장 보유자로 지정된 송월순 씨 역시 초대 보유자이자 큰 시아버지인 홍만년 어르신에게 일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1980년대 초 돈을 벌기 위해 정동모자 짜는 일을 배웠다. 정동모자가 기념품으로 불티나게 팔리던 시절이었다.
송씨는 “현대식 정동모자를 잘 짜면 당시 가격으로 2만5000원에 팔 수 있었다. 대충 짜거나 엉성한 것들은 1만5000원 정도에 팔리던 때였다”며 “마음이 조급한 사람들은 하루 만에 모자를 짰는데 그런 것들은 질이 나빴다”고 과거를 떠올렸다.
또 “정동 줄기를 구하러 아침 일찍 마을 사람들과 고구마 전분 나르는 트럭에 올라타 검은 오름도 가고 대천동도 갔다. 특히 대천동 정동의 질이 그렇게 좋았다”며 “정동이 가늘고 길어 벌립 짜기 딱 좋았다. 그렇게 재료들을 가져와 일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셋째를 낳고 나서 한 푼이라도 벌려고 모자를 배우기 시작해서 아이를 구덕째 업고 갔고 큰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셨다”며 “당시 송로동(현 귀덕리) 일대 집안들 모두 정동 짜는 일을 했는데 잣(돌)이 많은 골목이라고 해서 잣질(길)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 아이 등에 업고 배운 정동 공예 “조상 지혜 가득한 모자”
송씨는 직접 밭에서 정동 줄기를 재배해 쓴다고 했다. 줄기를 캐와 정성껏 말린 뒤 굵기에 따라 정동벌립을 짜는 데 쓰고 있다. ⓒ제주의소리
송씨가 짠 돌하르방 정동벌립. ⓒ제주의소리
송씨는 아직도 큰 시아버지가 “아이고 젊으난 곱게 짰어”라고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아이를 등에 업어가며 배운 정동 공예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만들었던 정동벌립은 도둑맞았다고 했다.
이어 정동벌립에는 조상의 지혜가 담긴 생활용품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생전 큰 시아버지는 막 이쁘지 않아도 밭에서 쓰는 거니까 구멍 없이 촘촘하기만 짜면 된다고 하셨다. 그렇게만 해도 비는 새지 않고 통기성이 좋은 정동벌립이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송씨는 “정동 줄기는 밭에서 따로 재배하고 있다. 8월 초순에 수확하면 10월 넘어 한번 더 걷을 수 있는데 올해는 비가 오락가락해 양이 적다”며 “걷어와 이슬을 맞춰가며 말리면 색이 갈색으로 변하고 그물망을 가지고 눈과 잎을 다 훑는다. 이후 굵기별로 구분한다”고 설명했다.
또 “정동벌립은 조상의 지혜가 가득한 모자다. 춥고 더울 땐 물론 험준한 산림에서도 썼다. 수풀을 지나가도 벌립이 가시를 모두 막아줬다”며 “제주 사람들이 노동은 물론 생활할 때 썼던 삶과 같은 존재”라고 강조했다.
그가 가진 정동벌립 기술은 현재 큰딸이 배우고 있다. 전수장학생인 큰딸도 어머니의 뒤를 잇기 위해 기술을 익히는 중이다. 송씨는 “보유자로서 자부심도 있고 명맥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한다. 크게 욕심은 없고 계속 전수되고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동벌립, 49x49x16.5cm, 1979. 이 정동벌립은 홍양숙 보유자가 생애 최초로 만든 정동벌립이다. 벌립에 흰띠가 둘러 진 건 전통의 원형은 아니다. 턱끈을 만드느라 편의상 흰띠를 두르고 끈을 연장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홍 보유자는 1979년 처음 정동벌립을 짜던 때 딱 한번 흰띠를 두른 이후 흰띠는 더 이상 두르지 않고 있다. ⓒ제주의소리
초대 정동벌립장 홍만년 보유자의 생전 모습. ⓒ제주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