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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코리아]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에 관한 비공식 기록(1)

  • 2025-02-21
  • 조회 387
원문기사
https://www.worldkorean.net/news/articleView.html?idxno=53249

2025. 2. 20. 삼다일보(송광호 기자) 

 

토론토에 거주하는 필자가 집안에서 발견한 과거 기록을 본지에 보내왔다. 1948년 일어난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을 당시에 체험해 남긴 기록이다. 진보와 보수로 갈라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되돌아볼 수 있는 자료여서 본지에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 기록은 공식 역사기록이 아니어서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혜량하시기 바란다.[편집자주]

 

8.15 해방공간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려 극심한 이념(理念)의 혼란에 휩쓸렸다. 이때 분단된 38선은 6.25 전쟁을 겪으며 굳어진 채 70여 년 성상이 흘렀다. 일본 강점기 때(36년)보다 2배 이상 길고 긴 세월이다.

 

일제강점기는 압제 기간이긴 해도 우리 겨레의 남북왕래는 자유로웠다. 오늘같이 국토가 두 동강인 채 혈육조차 오갈 수 없는 막연한 처지가 결코 아니었다.

 

해방 직후 남한에서 발발한 ‘제주 4.3사건’ 등 일련의 소요사건은 지금도 세인의 입에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 사건을 일부 언급한 노벨상 한국 작가의 작품도 구설로 오르내린다.

 

최근 나는 집안 책자를 정리 중 과거 남한 좌익 소요사건을 직·간접 체험하고 현장을 조사한 친척(군인과 경찰)의 기록을 발견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 대구 10.1 사건을 비롯한 당시 내용이 소설처럼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었다.

 

친척 책자라 해서 내가 모두 팩트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새로운 사실이 없는 기록인지도 모른다. 다만 작은 내용이라도 더 진실에 근접해 참고된다면 다행이겠다.

 

제주사태 책자

 

책자에서 제주 4.3 사태 관련 건을 발췌했다. 특히 제주 4.3사건이 현지 주민에게 준 상처가 무척 깊고, 아직도 회자되는 때문이다. 당시 남로당(공산) 무장대와 정부토벌대 간의 장기 전투로 희생된 억울한 상당수 주민의 재난, 명예피해 등이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까닭이다.

 

반세기가 흐른 뒤 1999년 김대중 정부는 <제주 4.3특별법>을 마련, 2000년 공포했다. 정부의 공식적 사과 아래 ‘4.3사건 진상 보고서’를 통해 과거 반목의 구겨진 역사를 청산하고, 21세기부터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새로 출발하자는 의미와 목적에서다.

 

2005년 1월 제주도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고, 다음 해 7월 1일 특별자치도로 출범했다. 마침내 2008년 ‘4.3평화공원’이 개관됐다. 벌써 20년 전후의 일이다.

 

해방 전후 당시 이해를 돕고자 잠깐 내 가족 배경을 밝힌다. 내 선친고향은 북강원도 회양군이다. 선친은 대지주의 7남매 중 장남이고, 친조부는 고향인 회양뿐 아닌 부근지역인 통천, 고성과 서울 등지에도 땅을 갖고 있었다.

 

친조부는 고향을 떠나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살았다. 그러다 1950년 북의 갑작스러운 남침으로 전쟁 시기 행방불명됐다. 내가 만4살 때다. 국가공무원과 직업군인이던 부친과 삼촌은 남쪽으로 피신했으나, 친조부는 인민경찰서로 잡혀간 후 소식이 두절됐다.

 

송광호 고모 결혼식(맨 왼쪽 송효순 삼촌)

송광호 고모 결혼식(맨 왼쪽 송효순 삼촌)

 

“공산당이라도 나이 먹은 나를 어찌하겠느냐”며, 서울 자택에 끝까지 남았던 친조부는 피난 가기를 거부하다 변을 당한 것이다.

 

선친 아래론 6명의 동생이 있었다. 그중 5번째가 고명딸 친 고모(송효숙/94세)로 형제 중 마지막으로 생존하다 지난해 서울에서 타계했다. 집안에는 직업군인인 친삼촌 2명과 경찰 간부인 고모부로, 그들은 대한민국 최일선에서 근무했다.

 

작은삼촌(4째/고 송효순)은 해방 전 경기 공립고(현 경기고) 교사로 있다가 1946년 육군사관학교(육사 2기)를 졸업했다. 6·25 때는 헌병 사령관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석방 계획을 수행하기도 했다.

 

삼촌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사 동기생(육사 2기)이었다(이하 존칭 생략). 5.16 후 박정희가 장기 유신정권으로 집권할 때 유정회 의원을 역임하고 국회도서관장을 지냈다.

 

고모부(고 최치환/60~80년대 5선 의원)는 고향이 경남 남해다. 만주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 경찰에 투신했다. 그는 이승만 시절 미국 국무성에 초청된 대한민국 첫 경찰 고위간부로 미국 전역 경찰청을 순회했다. 그때 미시간 대학원에 수학 중인 고모(고 송효숙)를 만나, 휴전 직후 서울에서 결혼했다. 고모는 해방 후 서울문리대 재학 중 1948년 도미했다. 대한민국 초기 미국 유학생으로 6.25 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다.

 

고모부(고 최치환)는 1949년 제주도 특별부대 사령부를 거쳐 지리산지구 전투경찰대 총사령관이었다. 6.25 전쟁 시기 50년 8월 대구지구방위사령관으로 낙동강 최후방어선 사수에도 공로가 있었다.

 

그로 인해 삼촌과 고모부는 6.25 전쟁 기간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미국 동성훈장, 미국 자유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훗날 그들은 타계 후 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최치환 고모부와 이승만 대통령 (훈장수여)

최치환 고모부와 이승만 대통령 (훈장수여)

 

참고로 본문과 관련 없는 국군창설 얘기를 덧붙인다. 해방 후 남한군대는 미군 하지 군정 사령관(중장)의 <군사영어학교>를 모체로 세워졌다. 그때 창군멤버 중 한 명이 학병 출신 고 최홍희 장군이다.

 

일제강점기 때 가라테 2단으로 일본 중앙대 유학생이던 최홍희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서울에서 태권도를 창시했다. 그는 대한태권도협회 초대회장과 첫 국제기구인 국제태권도연맹을 창설해 초대총재가 됐다. 박정희의 군 선배(소장)로 5.16 군사쿠데타에도 관여했다.

 

이후 두 사람은 국기 태권도를 두고 사이가 벌어져, 결국 최홍희는 1972년 1월 캐나다로 망명, 사망 시까지 만 30년간 캐나다 시민권자로 토론토에 거주했다. 운명 직전 그는 홀로 평양에 가 태권도 총재직을 북한 장웅 IOC 위원에게 인계(2002년)한 후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다음은 집안에서 발견된 제주 4.3사태 관련 기록을 발췌한 내용이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기 전 제주도에 많은 무기와 대규모 군사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미군 상륙에 대비했다. 비행장, 고사포진지, 해안요새와 방공호 등 고루고루 시설해 놓았으나 결국 하나도 써먹지 못하고 일본으로 쫓겨 갔다.

 

육지와 격리된 제주도에는 해방 후 중국 등지의 의용군, 팔로군 등 좌익계 주민이 대거 상륙해 살고 있었다.(참고로 제주도는 일제강점기 전남 제주군이었으나,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8월 12일 도로 승격됐다.)

 

8.15 해방 직후 제주 4.3사태 당시 1948년 10월 초 북한 외무성 부상은 이강국, 남로당 빨치산 군사부책은 이중업이었다.

 

제주도 좌익세력 우두머리는 지방 유지(조천읍 신촌리)인 이덕구(학병 출신)로서 제주도인민유격대 대장 겸 인민해방군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5백여 명의 좌익세력을 무장시킨 후 다시 1천여 명의 주민을 지방 공산당원으로 만들었다.

 

1947년 11월 제주도 모슬포에는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 제9연대가 주둔하여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9연대 중대장직에 있던 문상길(중위/경북 출신)은 원래 공산주의자로서 연대 내에 공산 세포 조직책의 임무를 띠고 깊숙이 침투돼 있었다.

 

그 외 제주도의 민간인 공산당 간부로는 남로당 제주도 당책 김달삼(군사부책 겸무), 남로당 제주도당 부책 조로구, 김용관 및 조직부장 김민성 등이 있었다.

 

남해대교 완공식에 참석한 최치환 고모부

남해대교 완공식에 참석한 최치환 고모부. 박정희 김종필의 모습도 보인다.

 

문상길은 도내 공산당원들과 결탁해 제주도 전부를,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두머리 이덕구는 처음에는 거사 날짜를 3월 말로 정해 놓았다. 거사 때 문상길이 공산당원들을 이끌고 도 경찰청과 제주경찰서를 습격하려는 계획이었다.

 

김달삼은 1,500여 명의 공산당원들을 인솔하고 서귀포, 모슬포, 경찰지서 등 14개소 지서들을 습격할 임무를 맡았다. 검찰 지청과 경찰서만 점령하면 제주도는 완전히 적화된다는 것이 그들 공산당원 생각이었다.

 

그러나 3월 말의 시일이 며칠 후로 연기됐다. “혹시 경찰이 기미를 눈치챘을지 모른다”는 이덕구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그것은 3월 말 대규모 폭동을 획책하기 전 2월 7일 <구국 투쟁>을 벌였을 때와 3월 1일 소규모 폭동, 3월 9일에는 소위 제주도 파업투쟁위원회를 급조해 봉급생활자들을 선동해 총파업을 주동했으나, 어느 것 하나도 성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3월 말 폭동계획에 대해 무척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들이 표면상 내세운 폭동의 명분은 남한의 ‘5.10 총선거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연기됐던 3월 말 폭동은 며칠이 지난 4월 3일에 드디어 감행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