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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소리] 우리가 잘 모르는 제주 ‘조천 공동체’의 역사와 저력

  • 2025-02-19
  • 조회 339
원문기사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433654

20256. 1. 26. 제주의소리(신소연 기자)

 

[탐라문화] 제주 조천지역의 민족운동과 저항의 역사

 

1967년 출범한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은 제주대학교 최초의 법정연구소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특히 학술지 ‘탐라문화’는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지 선정,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선정 등 제주에 대한 연구를 세상을 알리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다. [제주의소리]는 탐라문화연구원과 함께 ‘탐라문화’ 논문들을 정기적으로 소개한다. 제주를 바라보는 보다 넓은 창이 되길 기대한다. 연재분은 발표된 논문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제주시 조천만세동산 애국선열추모탑 전경. ⓒ제주의소리

제주시 조천만세동산 애국선열추모탑 전경. ⓒ제주의소리

 

어렸을 때 교과서를 통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다양한 사례를 접하지만, 정작 우리가 사는 지역의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제주도의 사례나 제주 출신 인물들이 역사에서 크게 부각 되지 않은 점도 있지만, 제주 내 민족운동이 4.3의 해석 과정에서 종종 평가절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출륙금지령으로 외부와 단절되었던 제주 사회가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레드 아일랜드(Red Island)'로 규정되기까지의 70여 년간, 그 변화의 간극은 매우 크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과정을 조천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왜, 조천지역인가? 

조천지역은 시기별 민족운동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지역이다. 1919년, 조천 김씨가(김해김씨 삼현파 이동문중 치현계 중심)를 중심으로 조천만세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 가문에서 많은 활동가들이 배출되었다. 1920년대에는 제주도의 초기 교육운동, 청년운동, 노동운동이 전개되었고, 김명식, 고순흠, 김문준 등 조천지역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인물들이 이러한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또한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경찰이 제주도 내에서도 특히 조천지역을 주목했으며, 해방 후 1947년 3.1 발포 사건 이후 읍면별 항의 집회와 시위가 일어났을 때도 가장 먼저 가두시위가 시작된 곳이 바로 조천이었다. 당시 조천면의 시위 행렬에는 2000~3000명이 참여했으며, 조천중학원 교사들과 조천 출신 활동가들은 4.3 사건 당시 군경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점들을 바탕으로 한말부터 4.3까지의 조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조천만세운동. 그 시작은?

1919년 제주의 조천만세운동은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장환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서울의 시위 소식을 전해 들은 김장환의 숙부들은 제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고, 거사일은 제주 유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만추 김시우의 소기일로 정해졌다.

 

김씨 가문을 비롯한 제주 유림들이 공유했던 민족정신과 실행력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선 종유관계(학덕이 높은 사람과 교류하며 사귀는 행위, 육지의 고위정객이 유배되었을 때 제주도 지식인들이 행했던 대표적 교육활동을 일컬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해은 김희정, 그리고 그의 제자 김시우

김시우의 스승인 해은 김희정을 통해 당시 제주 조천지역 유림의 성격과 민족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김희정은 조천지역의 토착세력으로, 『해은문집』에 따르면 그와 그의 아들 김항유가 과거에 합격하고, 김희정이 관직을 수행하면서 이서 계층에서 유력한 유림층으로 지위가 상승한 것으로 보인다.

 

김희정은 열두 살 때부터 추사 김정희와 교유한 매계 이한진(또는 이한우)에게 학문적 가르침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면암 최익현의 『사우록』에 이름이 기록된 유일한 제주 출신 인물로, 김윤식이 『속음청사』에서 "제주 온 섬이 김희정을 알고 있다"고 언급할 정도로 명망 높은 인물이었다.

 

1885년, 일본인이 가파도에서 제주 어민 3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제주 주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제주 출신 관리자로 당시 서울에 있던 김희정이 조사단에 파견되었다. 그는 조사단에 합류한 후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1891년 8월 8일부터 9월 12일까지의 일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이 바로 『도해록(蹈海錄)』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조정에서 먼 곳에 사는 백성을 위한 조치이긴 하지만 힘으로 제지하지 못하고 합동조사를 하다니, 젊을 때부터 나라를 위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정의를 들어왔거늘 이제 저들과 한배를 타게 되어 쓰지 못할 배움이 되고 말았으니 통곡유체(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가슴 아프게 우는 것)할 일.”

 

김희정은 젊은 시절부터 나라를 위하고 외세를 물리치는 정의를 배워왔음을 일기에 기록했다. 그의 스승인 면암 최익현 또한 이 책에 발문을 남기며 무기력한 조정을 비판하고 김희정의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김희정의 민족정신은 단순히 최익현의 가르침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종유관계를 살펴보면, 노사 기정진의 손자이자 항일 의병장인 송사 기우만, 영남 유생들의 위정척사 운동을 지원했던 김평묵,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자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은식 등과도 시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유한 기록이 있다.

 

그는 자신이 배우고 익힌 정신을 서원을 통해 제자들에게 전수 했다. 아마도 이러한 스승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인가? 김희정의 제자였던 김시우 역시 여러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북경으로 가서 문물을 체험했고, 북학을 연구하기 위해 이항로·김평묵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최익현과 교분이 있었던 용계 유기일을 찾아가 배움을 이어갔다.

 

제주 조천지역 유림과 근대사상의 만남

제주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개화사상에 노출되었다. 을미사변 이후 1897년 12월부터 약 3년 6개월간 제주에 머문 김윤식, 1907년 8월부터 약 3년간 머문 박영효, 1911년 약 5개월간 유배 생활을 했던 이승훈은 제주지역에 체류하며 제주의 유림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었다.

 

조천지역의 유림들은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 신학문을 접했고, 이러한 영향을 바탕으로 애국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대한자강회 시절부터 지회 조직을 주도했으며, 대한자강회의 후신인 대한협회에서도 지회 활동에 앞장섰다. 실제로 1908년부터 제주지역에서 열린 대한협회 정기통상회는 총 5회에 달하며, 이는 전국에서 중앙지회와 대구지회 다음으로 많은 횟수였다.

 

조천지역의 유림은 개항 이후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학문의 정통성보다는 다양한 학풍과 스승과의 개인적 교학 관계를 중시하며 급변하는 시대에 대비했다.

 

제주지역 유림의 성격과 영향력

제주의 유림은 학맥이나 스승의 학문적 배경에 관계없이 서로 강한 연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중앙관직 진출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한문 서당을 운영하며 제자를 양성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다. 이들은 자신과 뜻이 맞는 동문에게 자식의 교육을 맡기며 친족관계와 사제관계를 중심으로 지식인 네트워크를 조밀하게 형성했다.

 

개항 이후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자, 특히 조천 지역의 유림은 이를 유연하게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 학문과 교육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유림들은 자녀들을 서울, 목포, 광주뿐 아니라 일본으로까지 유학 보내며 새로운 학문을 습득하게 했다. 이렇게 성장한 유림의 자녀 세대는 근대 지식인으로서 일제강점기 제주 지역의 다양한 사회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 글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학술지 ‘탐라문화 제67호(2021)’에 ‘제주 조천지역의 근대 민족운동 형태의 변화과정’이라는 제목으로 실은 논문을 [제주의소리]에 싣기 위해 정리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