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열린마당

제주학연구센터에서 진행하는 행사, 강연 소식과 공지사항을 알려드립니다.

[제주도민일보] 제주에서 깨어난 조선의 선율, 탐라순력도를 따라 흐르다

  • 2025-02-20
  • 조회 280
원문기사
https://www.jeju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520

2025. 2. 9. 제주도민일보(최지희 기자)

 

국악의 불모지 제주에서 300년을 넘어 다시 울려 퍼진 궁중음악

 ‘탐라순력도, 풍류를 노래하다’ 공연 모습. [제주풍류회 두모악 제공]

‘탐라순력도, 풍류를 노래하다’ 공연 모습. [제주풍류회 두모악 제공]

 

쏙—!

 

화살이 날아가더니 비장의 상투 한가운데 정확히 꽂혔다.

 

비장은 깜짝 놀라며 상투를 더듬더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무대 한가운데로 뛰쳐나왔다.

 

“목사 나리! 저놈들이 사슴과 사람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대로 뒀다간 전투는커녕 우리끼리 먼저 죽게 생겼습니다!”

 

비장의 울분 섞인 외침에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장면은 탐라순력도 속 교래대렵이 그려진 배경을 설명하며 조선 후기 제주 병사들의 군사 훈련 실태를 연극적 요소로 재현한 것이다.

 

이형상 목사는 제주 병사들의 훈련 방식이 엉성하다는 점을 확인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군사 훈련과 사냥을 겸한 교래대렵(狩獵)을 시행했다.

 

"좋다! 사냥을 겸한 훈련, 교래대렵을 시행하겠다!“

 

그 순간, 무대 뒤편의 탐라순력도 속 교래대렵 장면이 서서히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탐라순력도의 교래대렵 장면에는 제주 병사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사냥을 진행하는 모습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그림 속 말 탄 군사들이 마치 현실처럼 생동감 있게 흐르며 조선 시대 탐라의 한 장면이 그대로 재현되는 듯했다. 관객들은 마치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몰입감을 경험했다.

 

‘탐라순력도, 풍류를 노래하다’ 공연 모습. [제주풍류회 두모악 제공]

‘탐라순력도, 풍류를 노래하다’ 공연 모습. [제주풍류회 두모악 제공]

 

■ 탐라순력도, 조선 후기 제주를 기록하다

지난 8일 제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탐라순력도, 풍류를 노래하다’ 공연은 탐라순력도를 기반으로 한 음악극으로 제주풍류회 두모악이 주최했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지난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탐라 지역을 순력하며 기록한 제주도의 풍경과 생활상을 담은 그림 기록물이다. 총 41면의 그림과 2면의 서문, 총 43면으로 구성돼 있으며 군사 훈련, 자연경관, 행정 점검, 백성들의 삶 등 조선 후기 제주 사회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이번 공연은 탐라순력도의 주요 장면을 연극적 요소와 궁중음악으로 풀어내며 조선 시대 제주를 무대 위에서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 궁중음악과 함께 탐라순력도가 살아나다

장중한 궁중음악이 무대를 가득 채우며 탐라순력도의 기록 속 장면들이 하나둘씩 무대 위에서 되살아났다.

 

성산포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생황과 단소의 맑은 선율이 새벽 바다 위로 퍼지는 빛을 형상화했다.

 

정방폭포 유람 장면에서는 배를 형상화한 무대 장치와 무용수들의 유려한 춤이 제주 바다의 운치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탐라순력도, 풍류를 노래하다’ 공연 모습. [제주풍류회 두모악 제공]

 

정방폭포 장면이 끝난 후 무대는 안덕계곡으로 배경을 옮기며 탐라순력도의 완성 과정이 그려졌다.

 

이형상은 탐라를 순력하며 제주의 지리와 군사 체계, 백성들의 삶을 기록했다. 행정적인 보고서를 넘어선 기록을 남기기 위해 유배 중이던 오시복과 교류하며 탐라순력도를 완성해 갔다.

 

당시 오시복은 감산(甘山, 안덕계곡)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형상은 그를 만나 제주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정리했고 오시복은 이에 맞춰 탐라순력도의 서문을 집필했다.

 

공연에서는 가야금과 거문고의 선율이 흐르며 탐라의 자연과 탐라순력도에 담긴 의미를 더욱 강조했다.

 

​‘탐라순력도, 풍류를 노래하다’ 공연 모습. [제주풍류회 두모악 제공]

​‘탐라순력도, 풍류를 노래하다’ 공연 모습. [제주풍류회 두모악 제공]

 

■ 왕과 백성이 함께하는 음악, 여민락과 수제천의 깊은 울림

공연의 대미는 왕과 백성이 하나 되는 의미를 담은 ‘여민락’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향악곡 ‘수제천’이 장식했다.

 

여민락(與民樂)은 세종대왕이 ‘왕과 백성이 함께 즐긴다’는 뜻으로 만든 음악으로 조선 시대 공식 행사에서 연주됐다. 왕과 백성이 하나 되는 순간을 기념할 때 연주됐으며 이번 공연에서는 탐라순력도의 여정과 연결돼 그 의미를 더했다.

 

수제천(壽齊天)은 ‘수명이 하늘에 닿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곡으로 궁중 연회와 중요한 의식에서 연주됐다. 삼현육각 편성(향피리, 대금, 해금, 장구, 좌고 등)으로 연주되며 신비롭고 장중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공연에서는 탐라순력도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며 장대한 선율로 감동을 자아냈다.

 

전통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깊고 웅장한 선율이 공연장을 가득 채우며 탐라순력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탐라순력도, 풍류를 노래하다’ 공연 현장 모습. [최지희 기자]

​‘탐라순력도, 풍류를 노래하다’ 공연 현장 모습. [최지희 기자]

 

■ 제주에서 다시 깨어난 궁중음악의 선율

제주에서 이처럼 장중한 궁중음악이 연주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제주는 오랜 세월 민속악과 무속 음악이 중심이었고 궁중음악은 단절된 상태였다.

 

김경아 제주풍류회 두모악 대표는 “국악의 불모지 제주에서 천년의 음악인 정악(正樂)을 뿌리내려 보고자 두모악을 창단했다”면서 “이번 공연을 탐라순력도를 소재로 한 브랜드 공연으로 발전시켜 제주뿐만 아니라 서귀포와 다른 지역에서도 꾸준히 이어갈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주목 관아를 비롯한 제주의 중요한 사적지와 문화재를 찾아 한국음악과의 접합점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공연 콘텐츠를 발굴하고자 한다”면서 “정악뿐만 아니라 민속악과 창작악까지 확장해 다양한 우리 음악을 선보이는 국악 전문 단체로 성장해 나가겠다”고 포부를 전했다.

 

​‘탐라순력도, 풍류를 노래하다’ 출연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경아 대표. [최지희 기자]

​‘탐라순력도, 풍류를 노래하다’ 출연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경아 대표. [최지희 기자]

 

■ 300년을 넘어 다시 흐른 탐라순력도의 선율

이번 공연을 통해 탐라순력도의 역사적 기록과 함께 조선의 궁중음악이 다시 제주에서 울려 퍼졌다.

 

과거 조선 궁중에서 울려 퍼지던 선율이 이제는 제주에서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되살아났으며 탐라순력도는 음악과 연극을 통해 조선과 제주를 잇는 문화유산으로 거듭났다.

 

이번 무대를 시작으로 궁중음악의 선율이 제주에서 더욱 깊이 뿌리내리고 탐라순력도가 지속적인 문화적 전승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