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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소리] 제주인의 이주노동은 제주를 어떻게 바꿨나?

  • 2025-02-18
  • 조회 289
원문기사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433189

2025. 1. 6. 제주의소리(노우정)

 

[탐라문화] ① 제주인 이주노동의 조건과 양상

1967년 출범한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은 제주대학교 최초의 법정연구소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특히 학술지 ‘탐라문화’는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지 선정,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선정 등 제주에 대한 연구를 세상을 알리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다. [제주의소리]는 탐라문화연구원과 함께 ‘탐라문화’ 논문들을 정기적으로 소개한다. 제주를 바라보는 보다 넓은 창이 되길 기대한다. 연재분은 발표된 논문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1923년부터 1945년까지 제주와 오사카를 오간 정기여객선 군대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23년부터 1945년까지 제주와 오사카를 오간 정기여객선 군대환.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 일본행

 

1629년부터 1823년까지 약 2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제주는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된 가운데 자급자족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바로 조선의 중앙정부에서 제주지역 주민에 대해 육지로의 이탈을 우려하여 실시한 ‘출륙금지령’ 때문이다. 이동제한의 족쇄가 풀리자마자 또 하나의 도전이 제주를 찾아왔으니 바로 일본의 강요에 의한 개항이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러 자본주의적 근대의 맹아가 움트던 한반도 지역과 달리, 출륙금지가 해제된 이후에도 제주사회는 여전히 정체상태를 면치 못했다. 제주도가 비교우위를 갖는 수산물과 일부 목축업 생산물 등에서 부분적으로 상업적 거래가 이루어졌을 뿐, 근대적 시장경제의 형태로 보편화되지는 못했다. 

 

자본주의경제에서 도태될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제주인들이 찾아낸 대안은 섬의 바깥에 있었다. 해녀들은 한반도 내륙과 일본 등을 넘나들며 ‘출가물질’을 했고, 나머지 제주인들도 일본, 특히 오사카 지역을 주요 거점으로 하여 임금노동자 생활을 했다. 타지에서 거둔 소득의 많은 부분이 제주로 이전해오면서 제주 경제는 그나마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특히 오사카 지역으로의 이주노동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일본이 고도성장기를 맞아 노동력의 공급이 절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에 산업기반이 없던 제주인들은 일자리를 얻고, 일본인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력을 구했던 셈이다.

 

이주노동을 가능하게 한 조건

일제는 1910년 조선강점 이후에 식민지에 대한 효율적인 지배와 경제적 이익추구를 목적으로 교통, 통신 등 근대적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확충해 나갔다. 물론 일제강점기 이전의 제주인들도  내륙으로의 왕래를 위한 해상운송수단을 적극 확보하고자 했다. 1894년 이종문이 인천 소재의 굴력상회(堀力商會)와 교섭하여 제주와 목포를 오가는 연안 기선을 월 1회 정도 비정기적으로 운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주도 내 항구시설의 미비로 안전상 문제가 크게 불거지고, 운행으로 인한 수익보다 손해가 컸던 관계로 불과 3년 만에 항로가 폐지되었다.

 

제주와 육지를 잇는 해상운송이 활발해진 것은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명령항로’를 운영하면서부터이다. 명령항로는 해운회사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행정적 지원을 통해 해상운송을 장려하는 정책인데, 이로 인해 수익이 적은 구간에도 정기적인 선박운항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1913년 4월에는 제주-목포 간에, 1915년 4월부터는 제주-부산 간에 정기항로가 개설되었다. 1920년대에 이르면 태서환(太西丸)(228톤), 황화환(晃和丸)(380톤), 보성환(寶城丸)(200톤) 등으로 운항 선박과 횟수가 늘어나게 된다. 

 

목포와 부산 등지로 오가는 해상운송이 활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지역에서 산업활동을 하는 것은 물질노동을 수행하는 해녀들에 한정되었다. 한반도가 아닌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부선 철도가 완공된 직후인 1905년 9월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부관(釜關)연락선이 취항하면서 일본을 오가는 정기항로가 개설되었고, 따라서 일본으로의 이동이 필요한 제주인들 역시도 부산으로 먼저 이동하여 부관연락선을 이용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이 바뀌는 것은 내륙을 거치지 않고 제주와 일본을 운항하는 항로가 개설되면서부터이다. 물론 1918년에 이미 ‘함경환’이라는 500톤급 선박이 제주-오사카 항로를 운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비정기 노선이기도 하거니와 선박회사의 편의에 따라 부산, 목포 등을 경유했기 때문에 제주인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도항 수단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주와 일본을 잇는 본격적인 항로는 1923년과 1924년에 걸쳐 아마가사키 기선부와 조선우선주식회사에서 각각 시작한 제주-오사카 간 직항로 운항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특히 아마가사키 기선부가 운영한 ‘군대환(君代丸, 기미가요마루)’은 해방 직전까지 제주와 오사카를 오가던 선박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여겨지기도 했다.

 

재일제주인의 이주노동의 양상

1934년 4월을 기준으로 남성 2만9365명, 여성 2만688명, 합쳐서 5만53명에 이르는 제주도민들이 오사카, 도쿄 등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약 25%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본에서의 일거리를 찾아 고향 제주를 떠났던 셈이다. 제주인의 이주노동과 관련된 기록은 1919년 오사카 가네부치(鐘淵) 방직공장에서 제주로 직원을 파견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직공으로 일할 것을 권유하는 모집활동을 했다는 것에서 처음 보인다. 초기부터 오사카에서 제주를 찾아와 취업권유 활동을 벌였다는 점이 특이한데,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제주와 일본 오사카 양측에 상호이익이 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한반도에서 3⋅1독립운동의 열풍이 불던 시기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폐허를 딛고 새롭게 번영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일본은 자국내 인구증가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고 더구나 세계대전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산업기반을 유지하면서 유럽지역으로의 수출 등을 통해 경제성장에 매진할 수 있었다. 

 

특히 일본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고베와 교토를 포괄하는 이른바 케이한신(京阪神, けいはんしん)지역에는 방직, 섬유 등 경공업을 중심으로 공업지대가 형성되면서 노동력이 상시적으로 부족한 상황을 맞았다. 일본 산업계의 입장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잉여 노동력이야말로 낮은 임금으로 충원이 가능한 최선의 대안이 되었다. 때마침 일본정부는 사전허가를 조건으로 입국을 허가했던 도항증명서 제도를 없애고, 식민지 조선인들의 ‘자유도항제’를 실시하게 되는데, 이는 제주인의 일본으로의 이동을 한층 원활히 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당시 오사카 지역 내에서 제주인들의 이주노동은 농업이나 어업은 극소수였고 공장지대의 직공에 집중되어 있었다. 산업적으로 보면 고무, 철공, 유리, 법랑과 같이 열악한 환경의 공장에 취업이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해당 지역 일본인들이 어로(漁撈)나 주조(酒造)에 주로 종사한 것을 감안하면 현지인들이 꺼리는 분야에 종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사카 일대에 근거를 둔 일본인 공장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제주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제주’라는 동일 지역에 기반하여 상호간에 유대감이 남다르고, 척박한 환경을 가진 제주라는 화산섬에서 살아가면서 근면함이 몸에 밴 생활력 강한 제주인이야말로 노동자로 고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측면이 있었다. 이런 일본인들의 호감을 바탕으로 제주인들은 앞서 이주노동에 뛰어든 이들이 뒤이어 바다를 건너오는 동향인들을 돌보고 배려하면서 오사카 일대에 집중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주인의 오사카 지역 이주노동의 순환적인 연쇄가 일어나면서 결국에는 동시대 제주 사람의 약 25%가 일본에서 삶의 근거지를 만들어 산업활동을 영위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떠나온 고향 제주에도 막대한 경제적 기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글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학술지 『탐라문화 제71호(2022)』에 「일제강점기 제주인의 이주노동과 제주사회의 변동」이라는 제목으로 실은 논문을 [제주의소리]에 싣기 위해 정리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