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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소리] 도민들의 일본 오사카 이주 노동...오늘날 제주를 만들다

  • 2025-02-18
  • 조회 257
원문기사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433344

2025. 1. 12. 제주의소리(노우정)

 

[탐라문화] ② 제주인 이주노동이 남긴 것들

1967년 출범한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은 제주대학교 최초의 법정연구소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특히 학술지 ‘탐라문화’는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지 선정,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선정 등 제주에 대한 연구를 세상을 알리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다. [제주의소리]는 탐라문화연구원과 함께 ‘탐라문화’ 논문들을 정기적으로 소개한다. 제주를 바라보는 보다 넓은 창이 되길 기대한다. 연재분은 발표된 논문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시간이 지나도 남아있는 이주노동의 흔적

일제강점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특이하게도 동북아 지역에서의 인적, 물적인 이동과 교류가 매우 활발했던 시기이다. 한반도의 남북분단과 냉전이 격화된 이후로 국가 간 교류가 오랫동안 단절되어 온 근래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례적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1945년 이후 80년 가까이 그러한 교류단절의 상황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해방 이전 제주와 오사카 간 해상항로가 활발한 인적 교류를 강화시켰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해방 이후에도 한반도로 귀환하지 않고 일본 오사카에 계속 거주하고 있는 제주인들이 형성하고 있는 교포사회를 보면 일제강점기 제주-오사카 항로를 통한 이주노동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2007년 김희철 선생과 진관훈 선생이 함께 저술한 「재일 제주인의 경제생활과 제주사회기증 에 관한 연구」를 보면 당시 일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마을별 친목모임들이 열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두 101개의 모임들이 조사된 것으로 나타났는데, 조천읍 신촌리나 서귀포시 법환동의 경우처럼 5개나 되는 모임이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다수의 마을들은 1~2개의 모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임들을 어촌계가 있는 해안마을과 그렇지 않은 중산간마을로 구분하여 지도상에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지도상에 표시한 재일제주인 인적 네트워크. 검은색 원은 해안마을, 회색 원은 중산간마을 / 사진=노우정<br>

지도상에 표시한 재일제주인 인적 네트워크. 검은색 원은 해안마을, 회색 원은 중산간마을 / 사진=노우정

 

위의 그림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현재의 제주시 지역 그리고 제주시와 가까운 애월읍, 한림읍, 조천읍 출신이 운영하는 친목모임이 상당히 많고, 서귀포 지역에서는 법환동과 강정동 등에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제주시에서 멀리 떨어진 표선면 지역에서는 친목모임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비균질적인 지역별 분포가 일제강점기 제주인의 이주노동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는 자료가 있다. 1934년 마쓰다 이치지(桝田一二)가 펴낸 논문 「1930년대 제주도민 일본행 출가기록」를 보면 당시 제주의 지역별 이주노동의 양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출가자의 집단지역은 우선 제주성내 중심지역, 그리고 한림 중심지역, 그다음이 서귀포 중심지역인데, 상기지역들은 핵심지역인데 표선 중심지역은 희소지역이라고 지적할 수가 있다”고 한 것이다. 마쓰다 이치지(桝田一二)가 말한 것과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2007년의 친목모임 분포가 놀라울 정도로 연관성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마을별 출가노동자의 숫자와 현재 일본에서 유지되고 있는 각종 친목모임 간에 일정한 상관관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오래전 제주인들의 행위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제주인들의 일본 오사카 지방으로의 대대적인 이주노동은 당연히 제주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획기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해녀들의 출가물질이나 어민들의 상업적 어로활동을 통해 제주도 내에서 농업지역과 어업지역의 경제력 차이가 커지게 되고 그에 따라 제주사회 내에서의 영향력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주노동이 남긴 제주의 변화

제주에서는 조선시대를 거치며 대부분의 마을들이 해안지대에서 거리를 두고 세워지는 게 보통이었다. 해안가에 자리잡은 마을인 이른바 ‘개촌’은 수시로 염해 등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농사에 필요한 토지가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는 중산간의 ‘반촌’에 비해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제주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농경이 중심이 되는 반촌지역 사람들이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해안마을 여성들인 해녀들의 물질노동이 교환경제를 통해 환금성을 인정받고, 일본으로의 이주노동 역시 해안마을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1939년 무렵에 조사된 농민생활비 조사에 따르면 중산간지역(고지대와 중간지대)의 경우가 1인당 17엔에서 22.5엔인 것에 비해 저지대는 31엔, 해안지대는 31.3엔으로 차이가 큰 것을 볼 수 있다. 

 

농민의 생활비를 비교한 자료이지만 제주의 해안마을에서도 농업을 겸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는 해발고도에 따른 제주의 지역별 생활수준의 차이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출가물질과 이주노동이 오래동안 이어져오던 개촌과 반촌의 경제력을 역전시킨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인데, 그러한 현상이 지금 현재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측면말고도 제주인들의 의식에 미친 영향 또한 적지않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오사카에 거주하던 제주인들의 상당수는 제주출신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다져진 단결력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각종 권익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 계급의식 혹은 민족의식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함께 형성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오사카 지역에서 발생한 상당수 노동쟁의에 재일 제주인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와 같이 투쟁경험을 공유하면서 사회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일본자본에 의한 제주-오사카 항로 독점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동아통항조합 설립운동과 관련해 ‘무산계급의 배’라는 표현이 오사카에 근거를 둔 재일 제주인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제기된 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주노동을 통해 생겨난 제주인들의 각성과 집단적인 의식화는 후일의 사건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해방 직후에 발생한 제주의 비극 4.3사건에는 일본에서 고향으로 귀환한 제주인 다수가 참여했는데, 타지역에 비해 앞선 민족의식 등을 바탕으로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분단의 영속화를 우려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인다. 

 

해방이 되면서 적지 않은 제주인들이 고향으로의 귀환을 선택했지만 많은 수가 일본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은 해방이후 본격적인 근대화과정에서 제주에 대한 물적지원을 이어가면서 제주사회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해방이후 본격적으로 설립된 재일제주인 단체들을 중심으로 일본 내 제주인들은 적극적으로 고향 제주의 근대화에 기여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자신들 출신지역에 대한 전기, 전화, 수도와 같은 인프라 확충을 시작으로 제주도 전체에 다양한 경로와 방법으로 각종 지원들을 이어 나갔다. 1960년대부터 재일 제주인들은 본격적으로 각자 자신의 출신지역을 중심으로 혹은 제주도 전체의 관심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기부활동에 나서게 되는데, 지금도 제주의 마을 곳곳에는 해당 지역출신 재일 제주인의 동상이나 공덕비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전개된 지원활동을 엿볼 수 있다. 지금 제주도가 귤 산지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도 일본 내 제주인들이 기존 밭농사를 대체할 수 있도록 대대적으로 감귤묘목을 보내온 덕이 크다. 재일 제주인들의 감귤 묘목 보내기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1969년과 1970년만 보더라도 2차례에 걸쳐 총 40만여 그루가 전해졌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이러한 다양한 기부 및 기여 활동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이주노동이 제주의 현재를 만들어온 하나의 요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주노동의 물결이 파도가 되어

제주인의 이주노동이라는 작은 물결이 현재 제주가 가진 인프라 다수와 주요 산업의 토대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파도가 된 것을 보면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제주에서 일본으로의 이주노동은 당시 제주와 일본 오사카 지역이 각각 당면한 여러 가지 현안 해결을 위한 대응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전개된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주노동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산업적인 측면은 물론이고 문화적인 측면까지 오늘날 제주의 모습을 만들어낸 매우 근본적인 동력을 제공한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가장 큰 원동력은 전례없이 심층적이면서도 급격히 전개된 근대화라는 시대상의 변화에 맞서 주체의 자각을 토대로 능동적 대응을 이어온 제주인들의 역동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오사카 지역으로의 이주노동은 척박한 화산토양에 살면서 형성된 근면과 성실이라는 제주인의 정체성을 재확인했다는 점과 이후 또 다른 정체성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학술지 『탐라문화 제71호(2022)』에 「일제강점기 제주인의 이주노동과 제주사회의 변동」이라는 제목으로 실은 논문을 [제주의소리]에 싣기 위해 정리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