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소리] 마을 전체가 기막힌 미술관, 제주 선흘에는 ‘그림 할망’들이 있다
- 202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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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 6. 제주의소리(문준영, 조승주 기자)
[신년특집] 점점 진화하는 조천읍 선흘1리 할머니 화가들
“하루하루 소중히 잘 살아내려는 또렷한 작가 정신”
제주에는 마을 전체가 미술관인 곳이 있다. 바로 조천읍 선흘1리. 2021년 그림 수업으로 본격화된 변화는 2024년 12월을 장식한 전시 ‘똘 어멍 할망 그리고 기막힌 신들의 세계’에 다다랐다.
이제 할머니 화가들은 일관성 있는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손님들을 맞이한다. 관람객이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펑펑 울거나, 그 매력에 반한 이들이 그림을 구입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마당 한 켠 창고들은 훌륭한 미술관이 됐고, 농부였던 할머니들은 미술관 관장이 됐다.
평균나이 85세 11명의 할머니들의 그림과 글, 본풀이에는 잊을 수 없는 오래 전 기억과 즐겨하던 상상들이 어우러져 있다. 딸이었을 때, 어머니었을 때, 할머니었을 때 그리고 이 전체를 연결하다 보니 생긴 초월적인 순간들이 담겨 있다.

'신나는할망' 오가자 할머니의 작품. ⓒ제주의소리
마당과 텃밭이 아늑하게 펼쳐진 마을의 한 주택. 창고 문을 열고보니 고래 등을 쓰다듬는 해녀의 모습이 화폭에 펼쳐져 있다. ‘신나는 할망’ 오가자(85) 할머니의 미술관이다. 고래 그림 옆에는 ‘신이 없어지면 안되지, 이녁(자기 자신)이 마음에 있는 정성이 신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신이 오면 그림이 신나게 그려지는데, 신이 안 오면 그림이 안 그려져.”
그 신의 정체는 ‘마음에 있는 정성’이다. 그래서 신나는 할망이다. 그림선생님들은 시작을 복돋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 구상 단계부터 마무리까지 모두 예술가 본인의 몫이다.
“잘 그렸어요? 잘 그렸다고 하니까 좋네. 나 창피해서 이게 되나(걱정했어요). 선생님은 ‘이만하면 됐지’(라고 말씀해주세요). 누가 이거 선생님이 말해줘서 그렸어요? 물어보는데 선생님은 ‘난 몰라, 알아서 하세요’ 이렇게 합니다. 내 머리 속으로 생각나는 거 그리는 거지. 사람들이 내 그림 보고 좋아하면 호쏠(조금) 더 그려볼까 생각하지.”

'무지개할망' 고순자 할머니의 작품. ⓒ제주의소리
마을 어귀, 큰 길가에서 바로 보이는 집 한복판에 바깥창고가 있다. 고순자(86)씨는 이 곳을 2022년부터 올레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여덟살 때 우리가 윗 동네에 살았는데 4.3을 만나니까 조천으로 피난을 갔는데 너무 작은 방에 살려고 하니까 억울해서 울었어요. 그때는 너무 어려우니까 공부보다 먹는 것이 중요했어요. 남의 밭에 가서 열심히 일하다보니 글 공부할 시간이 없었어요.”
4.3 이후의 삶은 ‘무지개’로 형상화돼 그림마다 등장한다.
“옛날에는 항고지(무지개의 제주어), 아휴 저디 항고지 섰져(아휴 저기 무지개가 섰다), 아휴 곱다 경해신디(아휴 예쁘다 그랬는데). 이제는 무지개 할망으로 이제 이름 지워놓으난 무지개를 아무거라도 그리고 있어요. 사람들이 ‘할머니 막 잘 그려신디’라고 하면 기분이 좋아요.”
4.3으로 피난 가며 겪은 ‘억울한 시절’부터,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하며 행복해진 삶의 순간들, 그 기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짝을 지어 화사하게 웃고 있는 동물들의 모습까지. 슬픔과 애틋함, 잔잔한 행복 등 그녀의 평생을 집약한 타임캡슐이다.
수줍은 듯 반갑게, 즐거운 듯 진중하게 관람객을 맞이하며 할머니와 나누는 대화는 이 공간을 완성시키는 느낌표가 된다.

'초록할망' 홍태옥 할머니의 '초록미술관'. 밖거리 창고가 전시실이 됐다. ⓒ제주의소리
‘초록할망’ 홍태옥(87) 할머니는 선흘리와 그림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2021년 동네 할머니 중 그림을 최초로 배우기 시작한 홍 할머니는 그림선생님들의 1호 제자다. 홍 할머니를 중심으로 함께 붙어다니는 3인방이 모였고, 그 다음은 5명, 그렇게 점점 늘어나 11명까지 예술가 학생이 늘어났다.
“4.3때 불 붙여난 생각하면서 다 그렸주...불 타 가지고 아무 것도 없언.”
여덞 살 때 4.3으로 집이 불타고 남은 돌무더기를 골라 좁씨를 심자 초록싹이 솟아오르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이 때의 절절한 이야기들을 그림과 글로 승화시켰다. 그림 옆에는 ‘힘들다 무섭다 무섭다 또 살아질건가 힘들다’라고 적혀있다.
아픈 기억 사이로 초록색은 치유의 매개이자 무기가 된다. ‘나쁜 사람들에게 로즈마리를 풍기면 나쁜 기운이 물러날 것’이라는 생각에 로즈마리들을 그림에 담았다. 로즈마리와 초록빛으로 가득한 ‘초록할망’이다. 방명록에는 ‘로즈마리만 보면 할머니가 생각날 것 같다. 오랫동안 건강하시라’는 글이 남겨져 있다.
홍 할머니는 관람을 마치고 집을 떠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림과 이야기, 그리고 따스한 배웅까지가 이 초록할망의 ‘초록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각별한 순간이다.
남편도 테우리, 아들도 테우리, 손주도 테우리라 소를 그림에 한 가득 표현하는 소막할망, 풍요로운 밭작물을 세심하게 표현하는 우영팟할망, 고목을 좋아하는 고목낭할망, 치매로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독특한 질감으로 밭을 표현하는 밧할망, 일평생 귤농사를 지으며 귤밭 한 켠에서 자란 무화과 열매에 반하게 된 무화과 할망, 평생 누군가의 엄마로 불리다가 본인 이름을 정체성으로 다시 삼은 춘자할망, 95년간 선흘마을에 살아온 우라차차 할망, 불과 관련된 그림을 주로 그리는 불할망 등 열한명은 고유의 세계를 펼쳐냈다.

'초록할망' 홍태옥 할머니가 관람객을 맞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제주의소리
도민과 관광객들은 이 마을 미술관에서 보고, 걷고, 대화하고, 전시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마을 곳곳의 미술관을 둘러보고, 드로잉 워크숍을 하고, 작품마다 담긴 뒷이야기를 만나는 예술창고 아트 투어까지. 이번 12월 전시는 유료전시로서 지속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의미도 있다.
선흘마을 로컬뮤지엄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십시일반 후원금을 마련해서 농협 창고를 임대한 주민들의 정성, 그림 창고를 무상으로 빌려준 따뜻한 마음, 자원봉사자들의 선한 행동력, 할머니의 미술관을 정돈된 시선으로 구성하며 힘을 보태는 ‘세 개의 손’ 구성원들의 실천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뜻을 함께하는 동네 목수와 건축가, 사진작가, 스타트업, 향수박물관 뮤제드파팡 등 보이지 않는 조력자들도 있다.
몇 년 간 그림을 매개로 돈독한 ‘우정의 공동체’가 생긴 것은 마을의 큰 자산이다. 할머니와 가족들은 함께 모여서 그림을 그리고 서로의 미술관을 구경하며 오고가고, 그림을 매개로 마실가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마을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호흡해온 최소연 예술감독(소셜뮤지엄)은 ‘할머니들이 건강하게 그림 그리는 활동을 지속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힌다.
“저는 그림 그리는 행위가 오늘을 기록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거든요. 많은 예술가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공연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대한 작품만을 위해서 저희가 작업을 하지 않거든요. 오늘을 잘 기록하다 보면 오늘 하루를 잘 마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할머니들께 ‘그림 그리면 치매 안 걸리고 건강해진다’ 이런 메시지를 드리기보다는 그냥 ‘오늘 하루 어떻게 잘 살아질 것인가’ 하고 항상 오늘 날짜와 이름을 적거든요. 그래서 (할머니들의 그림은)이제 작가 정신을 갖고 오늘 하루를 또렷하게 살아내는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림을 매개로 새로운 도전이 이어지는 하루하루. 할머니들의 예술창고로 모여드는 사람들. 할머니 화가들이 함께 모여사는 선흘1리의 즐거운 변화는 현재진행형이다.

매표소이자 안내소에서는 할머니들의 그림이 담긴 굿즈를 만날 수 있다. 마을 청년이 할머니들과 함께 고심하며 만든 결과물이다. ⓒ제주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