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소리][리뷰] 기구한 제주해녀 삶 통해 질문하는 ‘4.3의 기억·공유’
- 202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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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기구한 제주해녀 삶 통해 질문하는 ‘4.3의 기억·공유’
제주아트센터 입체 낭독극 ‘해녀 어멍’

제주아트센터 기획 공연 '해녀 어멍' 무대 인사 ⓒ제주의소리
제주4.3을 추모하는 국가추념일 앞에 어느덧 ‘77주년’이 붙기까지, 제주에 사는 이들에게 한 가지 익숙해진 것이 있다면 바로 4.3의 아픔을 공개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4월 3일 추념식 현장에서는 그날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과거가 전 국민에게 생중계된다. 생존자를 초청해 육성으로 듣는 자리, 학살터를 찾아가 원혼을 달래주는 자리도 이어간다. 뿐만 아니라 언론과 예술인들은 과거의 아픔뿐만 아니라, 그것을 현재의 시선으로 연결하는 여러 노력을 4월마다 기울이고 있다.
이런 활동의 대전제는 ‘기억’이다. 잊지 않아야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전제는 역할과 의무로 치환되며 또 다른 공유를 이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기억의 중요함은 분명하다. 폄훼하고 왜곡하는 세력이 여전히 들끓는 형국에서 4.3의 역사를 계속 찾고 알리고 기억해야 함은 분명하다.
다만, 생각을 다르게 접근해보자. 혹시 자신의 과거를 밝히고 싶지 않은 생존자도 있다면, 가까운 사람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만약 그런 피해자에게 증언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과연 올바른 일일까.
지난 10월 28일 제주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낭독극 ‘해녀 어멍’은 제주아트센터가 올해 야심차게 시도한 공연 기획 ‘이그나이트’의 화룡점정으로, 말 못할 4.3의 과거를 지닌 채,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어느 제주해녀의 기구한 삶을 통해, 우리가 자칫 놓칠 수 있는 당사자 중심의 사고·공감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다.
‘해녀 어멍’은 제주해녀 ‘귀덕’(배우 이정미)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다. 귀덕에게는 바다는 일터가 아닌 안식처에 가깝다. “어멍 죽어야 철드는 새끼”라고 불리는 아들(안병식)은 귀덕이 절대 팔 수 없다는 밭까지 내놓으라고 난동을 피운다. 같은 해녀인 딸(진소연)과는 어딘가 서먹서먹한 분위기다. 동시에 집회 현장을 보며 군인들을 떠올릴 만큼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나마 동료 해녀들(홍윤희, 김채원)은 귀덕의 사정을 잘 알기에 힘이 돼준다. 그런 와중에 4.3을 취재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진(김민하, 이진경)이 귀덕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작품은 과거의 아픔이 현재까지 영향을 주는 귀덕의 고달픈 삶을 비추며, 동시에 다큐 제작진에게도 상당한 비중을 둔다. 민감한 사생활까지 카메라를 담고 어떻게든 귀덕에게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집요하게 붙는다. 제작진 책임자는 “역사 앞에서 기록할 의무와 역할”을 강조하지만, 실무자는 점점 그런 태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베트남전쟁 당시 폭격에 울부짖는 나체의 어린아이를 촬영한 사진, 굶주린 아프리카 아이와 독수리를 함께 촬영한 사진 등을 거론하면서 귀덕에게 접근하는 태도가 옳은지 정면으로 질문을 던진다.
4.3을 기록하고 기념일로 만들고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의 생각과 입장은 고려하고 있나? 진실과 역사를 위한다면 그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지울 수 없는 피해와 트라우마를 헤집고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것이 대의를 명분으로 고통을 전시하는 행동은 아닌가? 극 후반, 질끈 감은 눈과 굳게 다문 입술로 관객 앞에 선 귀덕의 표정은 많은 질문을 던져준다.
이번 작품은 일명 ‘토산리 달빛사건’으로 알려진 4.3 학살을 소재로 사용했다. 당시 군인들은 달빛 아래에서 여성들을 확인하고 성폭력, 고문, 실종, 처형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귀덕을 토산리 달빛사건의 생존자로 설정하면서, 인물이 처한 상황과 고뇌를 한층 더 깊게 만들었다.
제주 안에서 창작된 상당수의 4.3 공연작품은 피해 사실을 알리는데 집중해왔고, 최근 들어서 4.3 전후의 시대상과 역사적 의미까지 살펴보고 있다. 연극 ‘해녀 어멍’은 한 여성 피해자와 실제 사건을 결합한 시도를 통해 4.3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시선을 공유한다.
다만, ‘해녀 어멍’이 4.3과 해녀를 각각 다루는 비중을 놓고 보면 전자에 힘이 쏠려있는 느낌이다. 일본의 핵오염수 방류를 비판하는 집회 장면과 활동가를 등장시키지만 유기적으로 녹아들지는 못한다고 느꼈다. 주인공을 해녀가 아닌 제주에서 다른 직군에 종사하는 동년배 인물로 대체해도 이야기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전반적으로 ‘해녀’ 귀덕 보다는 4.3 피해자로서의 ‘귀덕’에 쏠려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작품은 시놉시스에서 “귀덕은 제주4.3의 침묵을 넘어 오염된 바다를 지키기 위해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기로 결단한다. 이 비극적인 어머니의 마지막 투쟁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숙명적인 외침”이라고 소개한다.
실제 무대에서는 이런 소개에 부합하는 결단이나 투쟁을 “할망들은 매번 새 숨으로 낡은 숨을 버리고 새 숨으로 생을 이어간다”는 등의 울림이 있는 긴 독백을 다른 배우가 전하며 작품은 매듭을 짓는다. 이번 무대가 정식 무대를 바라보는 미완성이기에 아직 가다듬을 부분이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억척스럽게 물질을 하며 다 큰 아들의 철없는 응석도 못 이기는 척 받아주고 4.3의 트라우마를 평생 간직해온 귀덕이 반전에 가까운 결단이나 투쟁을 보여주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 동안 딸에게 말하지 못한 사정을 어렵게 털어놓는 것만으로 큰 변화이자 진전일 수 있다. 잠수병에 시달려도 뇌선 가루를 입에 털어 넣고 바다로 향하는 실제 제주해녀들처럼, 귀덕 역시 몸과 마음이 고되더라도 어김없이 바다로 향했을 것이다. 그런 귀덕에게는 생존 자체가 곧 투쟁이지 않았을까.
‘해녀 어멍’은 지난해 차범석 희곡상(장막 부문)을 수상한 김민정 작가의 작품이다. 연출은 지난해 제주아트센터에서 ‘지상의 여자들’을 공연한 바 있는 극단 ‘돌파구’의 전인철이 맡았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시선은 제주가 아닌 지역에서 활동하는 주목받는 연극인들이 참여했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다만, 그 시선이 해녀를 비출 때는 익숙한 설정(망나니 아들,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트라우마 등)으로 채워졌다.
제주해녀는 4.3 이후 초토화된 제주 섬을 복구하는 데 앞장섰다. 그녀들의 경제활동 덕분에 공동체가 유지됐고, 그 공동체들이 하나 둘 성장하며 오늘의 제주를 만들었다. 반면, 자신들의 권리를 배타적으로 휘두르는 경향 또한 빠질 수 없다. 강정해군기지 주민투표 과정에서 투표함을 오토바이로 갈취하며 기지 건설에 일조한 장본인들이 바로 해녀다.
4.3이란 역사 속에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감내하는 여성뿐만 아니라, 해녀의 진솔한 맨 얼굴도 ‘해녀 어멍’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다. 귀덕 역을 맡은 배우 이정미 뿐만 아니라 출연진들의 빼어난 연기와 몰입감을 선사하는 전인철 특유의 연출은 기대를 높이는 요소다.
제주아트센터는 올해 ‘제주 이그나이트 페스타 : 제주 해녀가 보인다’라는 주제로 공연 기획을 선보였다. ▲제주해녀이야기 섬, 숨, 삶 ▲제주해녀평화음악회 ▲창작뮤지컬 ‘이어싸 삼도바당’ ▲입체 낭독극 ‘해녀 어멍’까지 모두 네 개의 공연을 선보였다.
전통예술과 현대무용, 클래식, 뮤지컬, 연극까지. 각기 다른 장르가 ‘해녀’라는 공통된 주제로 선보이는 경험은 제주에서 보기 드문 기획이다. 특히 ‘해녀 어멍’은 장르 특성이나 내용에 있어 다른 기획들보다 개성이 돋보이는 정적인 느낌으로서, 전체 구성의 화룡점정을 장식했다고 본다.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창작뮤지컬 ‘이어싸 삼도바당’을 비롯해, 정식 무대에서 펼쳐질 ‘해녀 어멍’까지 내년 제주아트센터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