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건
奇虔
정의
조선 전기 세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문신.
개관
‘기건奇虔’은 1443년 12월부터 1445년 12월까지 제주목사로 재임한 인물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호는 청파靑坡,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고려 공민왕 때의 난신亂臣 기현奇顯의 후손으로 후에 청백리로 뽑혔다.
내용
기건은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지만 학행이 높아 세종 24년(1442)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정5품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세종 25년(1443) 9월에 발령받아 12월에 신처강辛處康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세종 27년(1445) 12월 첨지중추로 전출될 때까지 선정을 베풀었으며 불필요한 지방 관제를 없애고 해양 방어 체제를 개편하였다. 당시 제주 판관은 박제함과 정하생이고 대정현감은 강순이었다.
기건은 제주목사 부임 후 사람이 죽으면 장사 지내지 않고 시체를 구덩이나 산골짜기에 버리는 제주의 옛 풍속을 교화시켜 관곽을 갖추고 염습하여 장사 지내도록 하는 등 의례 제도를 확립시켰다. 나병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인 구질막救疾幕을 지어 환자 100여 명을 수용한 후 고삼원을 복용시키고 바닷물로 목욕시키자 거의 치료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제주목사 재임 중 제주 사람들이 전복 따는 것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황해도 연안 군수 재임 중에는 군민이 진상하는 붕어잡이의 고충을 생각하여 붕어를 한 번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기건은 세종 30년(1448) 전라도 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부임했을 때도 선정을 베풀었고 세종 31년(1449) 호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며 세종이 죽자 고부사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개성부유수를 지냈고 단종 원년(1453) 대사헌이 되었으며 인순부윤과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당시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던 그는 세조가 다섯 차례나 불렀지만 사양하고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특징과 의의
기건은 제주목사 재임 시 제주도 일대에 나병이 유행하자 병을 치료하기 위한 구질막을 설치했다. 환자들에게 의복과 식량, 약물을 나눠주고 승려들의 군역을 면제하여 의생과 더불어 나환자를 격리 치료하도록 했다. 또한 제주도민들이 전복을 공물로 바치는 것을 힘들어 하자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 문헌
김순택, <기건의 나관리 현장>, 《제주도사연구》 제5집, 제주도사 연구회, 1996.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역사 속 염근리 이야기》, 2011.
필자
김나영(金奈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