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시대
개관
탐라는 제주도의 옛 이름으로 제주의 고대 국가를 가리킨다. 탐모라국耽牟羅國·섭라涉羅·담라儋羅·탁라乇羅라고도 표기되었다. 탐라시대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2세기 고려로 편입되기까지 제주도에 소국小國 또는 국國 단계의 정치체가 있었던 시대이다. 탐라시대는 물질문화의 변화 양상에 따라 탐라 형성기, 탐라 전기, 탐라 후기, 중세 탐라로 구분된다.
탐라형성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는 문헌상 탐라로 불리기 이전 ‘주호州胡’로 기록된 시기이다. 원형 집자리인 송국리형 집자리와 비슷한 삼양동 유적, 용담동 유적, 하귀리 유적, 예래동 유적, 강정동 유적, 화순리 유적과 같이 마을 유적이 제주 전역에서 확인된다. 거점 마을을 중심으로 출토되는 위세품, 고인돌의 분포 등으로 볼 때 계급 사회를 반영한 탐라 형성기의 사회 모습을 보여준다. 오수전, 화천 등 중국 동전과 동경, 환옥, 삼릉촉 등 낙랑이나 한漢대 유물이 삼양동 유적, 산지항 유적, 종달리 패총, 금성리 유적 등에서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는 탐라(주호) 가 중국-한韓-왜를 잇는 동북아시아 교역 체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을 보여준다.
탐라 전기(3세기~5세기)는 제주 서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외부와의 교역이 활발해진다. 용담동 유적, 외도동 유적, 곽지리 유적을 중심으로 발전된 집자리 구조(외도동식 주거지)로 축조되었다. 철제 장검, 창, 주조 철부, 철촉, 유리구슬 등 피장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위신 재를 껴묻은 용담동 철기부장묘(적석목관묘)는 지배 엘리트(수장층)의 출현과 탐라소국으로 통합된 사실을 보여준다.
탐라 후기(6세기~9세기)는 본격적으로 주변국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 문헌에 집중적으로 기록된 시기이다. 중앙집권적 정치체로 성주, 국왕이 등장한 탐라국 단계이다. 탐라는 백제, 신라, 왜, 당 등 주변국에 널리 알려지며 국제적인 역량을 높이는 한편 활발한 해상 활동을 전개하였다. 지속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물자수요가 늘자 교통과 교역에 유리한 해안을 중심으로 생산(고내리 유적, 상모리 유적), 유통(곽지·금성리 유적, 종달리 유적)하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유적은 지금의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을 아우르는 제주성 안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되는데 탐라국의 중심지로 판단된다. 집자리의 구조 변화가 확인된다. 수혈식 움집에서 지상식으로 바뀌었다. 집자리 가장자리에 석렬을, 집 주변으로 돌담을 둘렀다.
중세 탐라(10세기~12세기)는 고려에 복속되기 전까지 성주, 왕자의 자율 통치에 의한 독립체제를 유지하였다. 1105년에 고려의 정식 행정구역인 탐라군으로 병합되었다. 그리고 의종 7년(1153) 탐라군은 탐라현으로 변경되었고 의종 15년(1161) 현령관이 파견되었다. 탐라국 체제는 해체되고 성주와 왕자는 상징적 존재로만 유지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유적은 수정사와 원당사, 법화사 등 불교사찰이다. 유물로는 고려도기, 고려초 녹청자, 해무리굽 초기청자, 중국제 송대 자기 등이 확인된다. 14세기 대촌현을 비롯해 제주도 내 16현촌 지역에 유물이 분포한다.
한반도에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고대국가로 성장 하고 있을 무렵 ‘탐라’라 불렸던 독립국이 존재하였다. 다만, 탐라와 관련한 독자적인 역사서가 현전하지 않아 건립 연혁 및 지배체제 등 구체적인 실체는 파악할 수 없지만, 탐라와 교류했던 한반도와 중국· 일본 사서의 기록을 통해 그 존재를 단편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여러 옛 문헌에는 탐라를 주호(국), 섭라, 담(탐)모라국, 탐라(국), 담라, 탁라 등으로 기록했다. 문헌에 탐라(국)가 처음 나타난 것은 《삼국사기》 백제 문주왕 2년인 476년 기록으로 확인된다. 문헌기록상 탐라(국)의 등장은 5세기경부터 확인되지만 고고자료인 ‘거점취락(용담동, 외도동, 곽지리 등) 형성’과 ‘용담동 철기부장묘 발견’ 등을 통해 3세기를 전후하여 존재하였음이 확인된다.
‘탐라耽羅’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불렀던 제주의 옛 이름이다. 고대 탐라의 이름은 문헌에 따라 《삼국지》의 ‘주호州胡’ 이후 ‘주호국州胡國’, ‘섭라涉羅‘, ‘모라牟羅’, ‘탐모라躭牟羅’, ‘탐부라耽浮羅’, ‘탐라耽羅, 貪羅’, ‘담라儋羅’, ‘탐라국耽羅國’, ‘탁라乇羅, 托羅’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으며, 가장 오랫동안 불린 이름은 탐라였다. 역사서 편찬과 서술 내용 시점을 고려할 때, 3~4세기까지 ‘주호’, 5~6세기대 ‘탐모라’를 거쳐 ‘탐라’ 국호로 귀착한 것으로 보인다.
탐라시대의 생업은 고고 유적에서 출토되는 식물 자료와 자연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집자리 등에서 출토되는 탄화 곡물은 주로 보리와 콩 등 잡곡류가 대부분이어서 주로 밭농사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곽지리 패총과 종달리 패총에서 출토된 소라, 전복, 오분자기, 고둥, 바지락, 큰전복, 빛조개 등의 다양한 패류는 지금 해녀들의 어로행위처럼 채집했음을 알 수 있다. 문헌에 기록된 ‘탐라복’, ‘진주’, ‘가옥’ 등은 고대 탐라 해녀들의 어로 활동에 의해 생산된 특산품이다. 그리고 멧돼지, 사슴, 소 등의 동물 유체를 통해 수렵 활동이나 목축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탐라는 외부와의 교역을 통해 섬에서 생산되지 않는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았다. 산지항에서 출토된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곽지리 패총과 종달리 패총 등에서 출토된 화천 등 중국 화폐를 통해 탐라가 동아시아 교역에서 중요 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탐라와 한반도 남부지역의 교류 사실은 탐라 유물이 출토된 남해안 해남 군곡리와 삼천포 늑도 유적을 통해 확인된다. 문헌에서는 탐진(지금의 강진)지역으로 물자 이동이 확인된다. 5~10세기경 탐라는 작지만 강한 독립적인 정치체였다. 고대 탐라국은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과 화산도라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해 나가고자 바다를 매개로 주변국들과 활발하게 대외 교류함으로써 독립국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645년 신라 선덕여왕이 이웃한 나라들 가운데 경계해야 할 적대국들이 침범하는 재앙을 막아달라고 세운 <황룡사구층목탑> 중 탑의 제4층에는 ‘탁라(탐라)’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탐라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663년 한반도에서 벌어진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전인 ‘백강전투(백제·탐라·왜⟷신라·당나라)’와 666년 중국 당나라 고종이 거행하는 ‘태산 봉선제封禪祭(제천의식)’에 탐라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과의 공식적인 교류는 《일본서기》에서 확인되는데 백제 멸망 이후인 661년부터 30회 정도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66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일본 사신의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했다가 귀국할 때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에 간 이후 일본과의 교섭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져 많은 왕자와 좌평이 일본을 다녀왔다. 또 680년 9월과 686년 8월에는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록도 있다.
탐라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전 태조 8년(925년) 11월에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였다. 938년 12월에는 탐라 국주國主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해 입조하고 고려로부터 성주·왕자의 작위를 받아 고려의 번국蕃國으로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하였다.
참고 문헌
강창화, <제주의 고고학>, 《제주학개론》, 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 센터, 2018.
국립제주박물관, 《탐라》, 2018. 제주사정립사업추진협의회, 《탐라사》Ⅰ, 2010.
필자
박근태(朴根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