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문화 대백과사전


해녀항일운동가


해녀항일운동 세 주역(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흉상_해녀박물관

개관

부춘화·김옥련·부덕량 세 사람은 1932년 1월 하도·종달·세화·우도·시흥·오조리지역 해녀 1천여 명이 참가한 해녀항일투쟁을 주도했던 여성이다. 이들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에서 함께 한글 공부를 하고 근대 민족의식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제주섬 동쪽의 토지는 척박하여 여성이라면 모두가 물질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웠다. 먹고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삼던 물질 노동의 가치에 대해 세 해녀는 야학을 통해 새롭게 자각하게 되었다.
부춘화는 1928년 하도리 해녀회장으로 뽑혔고 김옥련·부덕량도 해녀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항일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해녀항일운동 과정에서 해녀조합의 부당함에 대한 항의 시위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1931년 12월 20일 일제의 해녀 착취에 항의하기 위한 하도리 해녀회 대표회의에서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해녀 대표 10여 명과 함께 1932년 1월 세화리 장터 시위에서 해녀들을 규합하며 시위에 앞장 섰다. 모든 해녀투쟁 참여자를 대표하여 일본인 제주도사와 직접 협상을 했다.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경찰에 체포되어 미결수로 6개월간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안타깝게도 부덕량은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1939년 10월 4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32년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대중운동이며 민족운동이다. 여성들이 주체가 된 운동이었고 연인원 1만 7천 명이 참여한 일제강점기 최대의 제주도 항일운동이자 한국 최대의 어민항쟁이었다.
해녀투쟁을 항일운동으로 기억하게끔 하는 학계와 지방정부의 일련의 성과에 대해 국가가 공인하는 과정을 밟았다. 해녀투쟁기념사업회에서는 2001년 3월 해녀투쟁 관련자 11명에 대한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해녀투쟁이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했다는 점과 해녀투쟁 관련자들의 해방 후 행적 때문에 독립유공자 선정을 유보하였다. 이에 대해 기념사업회는 정부와 국회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해녀투쟁은 사회주의 이념을 방편으로 한 것이었지 실제로는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정부는 항일운동의 범주를 문화운동·사회운동으로 외연을 확대하게 되었고 해녀투쟁을 주재소 습격, 폭력시위의 전개 등 3·1운동 못지않은 항일투쟁의 양상을 띤 사회운동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2003년 8월 15일 정부는 해녀투쟁의 전면에 나선 부춘화·김옥련 등 2명의 해녀와 혁우동맹원 문도배·한원택을 독립유공자로 선정함으로써 비로소 이 투쟁에 대해 항일독립운동으로서 공식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어서 2005년 3월 1일에는 제주야체이카의 총책임자였던 강창 보와 혁우동맹원 강관순·김성오·김순종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2005년 8월 15일에는 해녀투쟁의 주역 3인 가운데 한 사람인 부덕량과 혁우동맹을 실질적으로 지도한 신재홍과 혁우동맹원 채재오 등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이로써 해녀투쟁은 국가에서 공인된 항일독립운 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_해녀박물관


참고 문헌

박찬식, <제주 해녀의 항일운동>, 《제주해녀항일투쟁실록》, 제주 해녀항일투쟁기념사업추진위원회, 1995.
박찬식, <제주 해녀항일운동의 주역>, 《제주학 인물사, 20세기 제주를 빛낸 여성들》, 제주학연구센터, 2022.
현상호, 《제주도 해녀투쟁의 사실》, 1950.


필자

박찬식(朴贊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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