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및 근세
개관
한국사에 있어 중세는 대체로 고려를 전후로 하는 시기를 지칭하며 근세는 19세기 말 근대 이전의 조선시대를 일컫는다. 아무런 장치 없이 맨몸으로 잠수해 전복·미역 등의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자를 일컫는 ‘잠녀’ 혹은 ‘해녀’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고고학적 유물 및 문헌 기록을 참조할 때 해녀의 존재는 제주 사람들의 오랜 역사와 같이했을 것이라 추정될 뿐이다.
한국사의 중세시기에 해당하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에는 ‘탐라의 진주’에 대한 기사가 3번 등장한다. 첫 번째로는 고려 문종 33년(1079) 탐라국의 구당사勾當使 윤응균尹應均이 큰 진주 2개를 고려에 보냈는데 별처럼 빛이 나자 사람들이 이를 두고 ‘야명주’라고 불렀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두 번째는 충렬왕 2년(1276) 윤3월 원나라에 서 임유간과 회회인回回人 아실미리阿室迷里를 탐라에 보내 진주를 채취하게 했다는 기사이다. 세 번째는 동년 6월 임유간이 이를 얻지 못하자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진주 100여 개를 탈취해 돌아갔다는 내용이 전한다.
한국사의 근세시기인 조선시대에는 잠녀潛女 또는 해녀海女, 채복녀採鰒女, 채곽녀採藿女에 대한 기록이 있다. 대개 미역·전복 진상품 마련을 위해 맨몸으로 바닷속을 잠수하는 모습을 묘사하거나 과중한 진상역으로 말미암은 그녀들의 고달픈 참상에 대한 애처로움을 적은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 전기 전복 채취 및 진상·조달의 역役은 남자인 포작인鮑作人의 몫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포작인에 대한 과중한 진상과 부역으로 인해 포작인의 존재는 점차 사라져 갔다. 결국 그들이 담당하던 전복 및 해산물 진상의 역이 잠녀들의 몫으로 전가됨에 따라 포작인과 잠녀와의 용어 및 관계적 의미의 구분이 모호해져 갔다. 한편 진상역의 부과가 가호家戶 단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을 책임지는 포작인들과 같은 일을 수행하는 잠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유리하였기에 남녀(부부) 협업과 진상역 분담을 위해 포작과 잠녀가 가족을 이루는 사례가 일반화되었음을 당시 호적중초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 잠녀들은 관아에서 미역, 전복 등 해산물 공납을 부과하기 위해 작성된 명부인 잠녀안潛女案에 등록되어 채취물 일부를 정기적으로 상납하여야만 했다. 하지만 영조 22년(1746) 잠녀들이 채취한 전복과 미역을 관에서 사들이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전반 잠녀안이 폐지됨으로써 관의 부역 동원에 따른 의무적인 전복과 미역의 채취는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세기 초, 관에서 잠녀로부터 전복과 미역을 사들이던 방식도 혁파되어 수세水稅를 내는 방식만 남았다가 헌종 15년(1849) 잠녀에 대한 중앙정부의 역 부과가 모두 혁파됨으로써 비로소 잠녀들이 진상, 공물의 고역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참고 문헌
국립제주박물관, 《그림에 담은 옛 제주의 기억, 탐라순력도》, 2020.
김나영, <조선시대 제주지역 포작의 사회적 지위와 직역변동>, 제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박찬식, <제주해녀의 역사적 고찰>, 《역사 민속학》 제19호, 한국역사민속학회, 2004.
좌혜경, 《제주 해녀》, 대원사, 2015.
필자
김나영(金奈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