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문화 대백과사전


근대


개관

1876년 개항되자 제주해녀들은 두 가지 변화를 겪었다. 조선시대의 ‘출륙금지’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출가하며 경제적 수익을 얻게 되었다. 일본 어민이 제주 바다로 진출하면서 제주어장이 황폐화되자 해녀들의 채취량은 부쩍 줄어들어 생존권을 위협받게 되었다.
제주해녀들의 출가는 1887년 부산의 목도牧島로 간 것이 시초였다. 이후 일제강점기로 들어오면 한반도 남부지역뿐만 아니라 북부지역, 일본, 중국 다롄[大連], 칭다오[靑島],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확대되었다. 출가해녀 수는 1910년대에 2,500여 명이던 것이 1930년대로 들어오면 4,000여 명에 달하였다. 해녀들은 매년 4월경에 출가하여 9월까지 활동하였는데 해녀가 많이 분포했던 구좌면·성산면의 경우 이들의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제주도 전체의 절반이나 될 정도였다.
출가해녀들은 그 지방 어민과의 분쟁으로 시달림을 받았다. 해녀들은 채취한 해조류를 객주에게 팔았는데 객주들이 채취량과 가격을 속이는 일이 허다하였다. 객주들의 자금은 거의 일본 상인들이 대어 주고 이들 상인들은 객주와 결탁하여 해녀들의 채취물을 헐값으로 사들여서 일본인이 세운 해조회사에 넘겼다. 제주해녀들은 갖은 수탈로 생활은 매우 비참하고 궁핍했다.
출가해녀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접한 김태호 등 제주도의 유지들은 출가해녀들을 보호하고자 1920년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을 창립하였다.

 

제주도해녀어업조합연혁_1930_해녀박물관 소장

 

해녀조합은 제주도 일원을 대상으로 조합원 8,200명을 가입시키고 해녀들의 권익 보호와 신장을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해녀조합은 일본인 제주도사濟州島司가 조합장을 겸임했기 때문에 점차 어용화되어 갔다. 소수의 일본인 상인이나 조선인 중간상인과 결탁하여 생산자의 자유 판매를 금지하고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정가격을 매기면서 수탈하였다. 해녀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해녀조합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고 결국 1932년 구좌·성산지역을 중심으로 해녀투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해녀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통해 국가의 예속에서 서서히 벗어나 돈벌이를 위해 출가노동에 적극 나서고 나아가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적극 저항하는 해녀의 역사적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박찬식, <제주 해녀의 역사적 고찰>, 《역사민속학》 19, 2004.
박찬식, <제주 해녀의 유래와 역사>, 《제주해녀 이해》, 제주학연구센터, 2018.
안미정, 《한국 잠녀, 해녀의 역사와 문화》, 역락, 2019.


필자

박찬식(朴贊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