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어권 분쟁

《제주도해녀입어문제경과》(1895~1932년 기록)_해녀박물관 제공
정의
해녀들의 출가물질로 인해 경상남도 어장에서 공동 어업권(입어권)을 둘러싸고 지역 어민들과 해녀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
내용
19세기 말까지도 한반도 연안의 어민들은 바다 밑 패조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연안어업에 대한 전용 어업권의 설정도 없었다. 제주해녀들은 남해안으로 진출하여 자유롭게 출가 어업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제주해녀들이 처음 출어한 지역인 경상남도 울산과 기장은 우뭇가사리와 미역 중심 어장인데, 일본 상인들은 경제적 가치가 높던 우뭇가사리 채취를 위해 제주해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미역을 중시하고 미역밭 소유의식이 강한 현지 어민들의 반감을 의식해서 제주해녀들은 주로 우뭇가사리·은행초 등을 채취했다. 20세기 초까지 출가해녀들과 현지 어민 사이에 큰 갈등은 표출되지 않았다.
1910년대에 들어와서 출가해녀들의 채취물 가격이 높은 것을 간파한 현지 주민들은 자신들의 토착 권리를 주장하면서 해녀들로부터 입어료를 대폭 늘려 징수하려고 했다. 이에 제주 출가해녀들과 지방 어민들, 현지 어업조합 간에 적지 않은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12년에 일어났던 울산 소요 사건이었다. 이 소동은 울산·부산 경찰관과 부산 헌병의 출동으로 겨우 진압되었다. 이것이 입어문제 분쟁의 시초였다.
이 분쟁을 계기로 1913년 조선총독부와 경남의 행정 당국자들을 현지에 파견해 향후 소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녀입어협정을 체결했다. 결국 1913년부터 제주해녀들은 새로 생긴 울산군 서생면의 4개 어업조합과 동래군 기장 어업조합의 제6종 면허어장에 입어료를 내고 채취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13년 협정 이후에도 해녀 입어 문제는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계속 난항이 거듭되었다. 1913년 당시 울산지역 어장의 해녀 1인 입어료는 4원 30전으로 전년도인 1912년 3원에 비해 대폭 인상되었다. 해녀 1인의 우뭇가사리 평균 채취량은 감소하는 데 반해 입어료는 인상됨으로써 제주 출가해녀들의 생활고가 더욱 심해졌다. 때문에 울산 방면으로 출가하던 해녀 수가 매년 1천7~1천8백 명이었는데 1913년에 1천3백 명으로 줄어들었다. 채취량의 감소와 고가의 입어료 때문에 제주도로 돌아가는 해녀가 점점 늘어서 1913년 6월 8일 부산에서 제주로 향하는 배편으로 약 150명이 제주로 귀환했고, 울산에서 종사하는 제주해녀는 8백 명 내외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제주해녀의 총대인 주정회와 송해옥 등은 6월 10일 수산조합 본부에 출두하여 해녀들의 구제책을 건의했고 6월 17일에는 제주해녀를 중심으로 부산 목도, 영도에서 대집회를 개최하여 입어료 인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당국에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제주도 및 한반도 각 지역의 해녀들이 연합하여 전라남도청에 1914년도 해초조업료(입어료)의 인하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제주도 해녀 객주업자 24명의 총대 김경찬 외 6명, 부산 해초 객주업자, 수산조합 관계자 등이 1915년 4월 23일 제주도 해녀 입어요금 출자에 대한 상담회를 열었지만 다양한 의견이 도출되어 결정하지 못했다. 1917~1918년 제주도 조천면 출신의 주정회(당시 해녀객주업조합장 겸 제주도 출가해녀연합회 대표, 절영도 거주)는 출가해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경상남북도 연안의 해녀 출가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상호 분쟁 사건을 여러 건 중재했다. 그 결과 해녀들의 입어 제한을 상당 부분 해제하고 어장 매매를 금지하는 데 주력했다.
1920년 제주도해녀어업조합 설립 이후 조합은 해녀들의 권익 보호와 신장을 위하여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부산에 있는 조선해조주식회사 주식 1천 주를 인수하여 공동판매를 조합의 직접 관할로 전환했다. 해녀조합의 공동판매고는 1921년에 9만 원, 1922년에 19만 원, 1923년에 22만 원, 1924년의 경우 30만 원으로 급신장했다.
그 결과 제주해녀들의 출가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출가해녀의 급증으로 경상남도지역 어업조합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해녀조합의 활동 이후 1923년 기장지역에서, 1924년 부산 영도 동삼동지역에서 그 지역 어업 조합과의 분쟁으로 인한 폭행 사건까지 발생했다.
1923~1924년 제주도해녀조합과 지역 어업조합 사이의 해녀 입어를 둘러싼 연속적인 분쟁이 있었다. 이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당국은 수차례 협상 끝에 1925년 2월 27일에 ‘해녀의 입어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문의 제1항에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원인 출가해녀는 향후 지역어업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했고, 제2항에는 “현재 지역어업조합 지역 내에 거주하는 제주해녀로서 천초·은행초·앵초 등을 채취하는 자는 제주도해녀어업조합원으로 간주한다.”고 했다.
이 협정에 따라 제주해녀들은 경상도지역 어업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생산물의 절반 이상을 해조회사에 팔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입어료도 거의 5할 이상 인상되었다.
제주도 해녀는 1,712명에 한하여 부산·동래·울산 지방에서의 입어를 허가받게 되었다. 1931년 3월 현재 제주해녀어업조합에 소속된 제주 출가해녀 540~550명이 경상남도로 이주하여 경남지역 어업조합에 가입해 활동하게 되었다. 결국 1925년의 협정으로 많은 제주도 해녀들은 경남 어장에 이주 정착하여 경상남도 어민으로 살아가게 되었고 출가로 인한 수입 확보에 불리함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1925년 해녀입어협정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해녀어업조합에 소속된 출가해녀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전라남도 측은 종래의 관행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경상남도 측에 전달했다. 전남 측은 이주 해녀를 지역 어업조합에 소속시켜 버림으로써 제주해녀어 업조합은 유명무실해지고 기존에 부산·동래·울산의 전 연안에 입어 관행을 가지고 있던 것이 한 지역의 어업조합에 가입함으로써 다른 어업조합의 지역에 대한 관행은 상실하게 되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경남 측에서는 ①이주 해녀가 지역 어업조합원이 되어도 기존 관행은 인정한다.
②입어료의 경우 1925년 협정에 규정한 입어료를 군내 어업조합 수에서 나눈 금액을 각 어업조합에 징수하고 그 총액을 초과하는 새로운 부담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제주 출가해녀가 경상남도로 이주한 이상 경남도민이기 때문에 어업령 제4조 제15조의 적용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미 타지로 이주 전적한 이상 타 도의 도민이 된 것이며 타 도의 앞바다를 빌려 영업하는 약점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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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찬식(朴贊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