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문화 대백과사전


출향해녀


이칭

출가해녀


정의

제주에서 태어나 국내외의 다른 곳에서 물질하는 해녀 혹은 현지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는 해녀.


내용

제주해녀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수산물의 상품 가치가 형성되면서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바깥물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1879년 전라남도 청산도, 1880년경 울산과 기장을 비롯해 전라남도 다도해 각 도서와 거제도에서 경상북도를 거쳐 강원도와 함경도로 나갔다. 우리나라의 주요 해녀 출향지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등 동남부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구로시오 난류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 하여 우뭇가사리와 같은 해조가 풍부하였고 조선 후기에 부산을 거점으로 일본과 무역을 행하던 동래상인東萊商人들이 활발하게 상업활동을 해 오던 지역이었다.
1880년대 말 제주도 어장에 일본의 잠수기선이 진출하여 어장의 황폐화가 일어나 해녀들의 물질을 압박하고 정기선과 같은 항로가 개설되어 해녀의 이동이 가속화되었다. 또한 일제의 군수산업 원료로 해조의 채취가 중요해지자 이를 채취할 수 있는 제주해녀의 물질이 주목받았다. 일제강점기부터는 우리나라 각 연안과 일본 열도의 해안 곳곳에 제주해녀들이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이동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의 다롄, 칭다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해 일본의 여러 지역으로 출향하였다. 1929년 4,310명에서 1932년에는 5,078명이 출향했다. 당시 출향해녀들의 지역분포는 일본이 1,600명, 한반도 연안이 3,473명이었다. 1932년 제주도 어업조합의 조합원 수가 8,850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57%에 해당하는 인원이 일본으로 출향하였다. 1932년 해녀들이 한 해 송금해 온 액수가 1백 1십만 엔이었다. 당시 채취한 것은 전복, 해삼, 그리고 산업원료에 쓰인 우뭇 가사리와 감태 같은 해조류였다. 해녀 출향지는 한반도 주변 연안은 물론 동북아시아 해역을 아우르는데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던 중국의 다롄과 칭다오 외에 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그 범위가 동북아시아 해역으로 확대되었다.
출향과 귀향을 반복하던 해녀들은 현지의 남성과 결혼 하거나 혹은 가족들이 해녀가 있는 곳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 해녀들의 정착에 따른 제주 사람들의 이주가 나타나는 등 현지에서 작은 제주사회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출향하는 해녀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출향해녀가 감소하게 된 데에는 <수산업법>의 개정으로 마을어장의 자원이용의 권리가 마을 주민에게 우선적으로 부여되고 타지 출신인 제주해 녀들의 입어권이 제한된 영향이 컸다. 또한 제주도의 유채와 감귤 등 환금작물의 재배와 의무교육계획(1954~1959) 시행으로 여자아이들에게 교육 기회가 주어지는 등 국내 외 사회 변화가 제주해녀 전체 인구의 감소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초반 <수산업법>이 현지에 정주하는 이들에게 어업권을 부여함으로써 현지에 정착하는 사례가 늘어 해녀들의 바깥물질은 급격히 줄었다. 1970년대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이촌향도의 물결을 따라 육지로 나간 여성들이 이전 세대와 함께 물질을 지속하였고, 또 현지인 들이 제주해녀에게 배워서 물질하는 등 우리나라 각 연안에 해녀 어업공동체가 형성되는 데에 제주해녀들이 산파 역할을 하였다.
넓은 의미에서 출향해녀란 일제시기부터 제주도에서 국내외 여러 곳으로 물질을 나갔다가 정착한 해녀들과 그들로부터 물질을 배워 현지에서 물질을 하고 있는 그 후손을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제주해녀들 가운데에는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 이전까지 출향하여 바깥물질을 하였던 이들이 많다. 해녀들은 공식적인 출어자로 허가받고 타지로 나가기도 했으나 인솔자들이 모집하여 각지로 이동하는 자발적이고 비공식적인 이동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선주나 모집인(모집꾼)이 15~30명 내외의 해녀들을 인솔하여 바깥물질에 나선 것이다.
해녀들은 주로 봄에 고향을 떠나 물질하다 추석이 다가 오면 귀향하였고 이러한 출향은 반복적으로 이뤄졌다. 출어하는 지역도 한 곳을 여러 차례 가기도 하지만 지역이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해녀들은 타지에서 물질하는 것을 ‘섬 바깥에 나간다.’고 하여, 이를 두고 ‘바깥물질’이라고 일컬어 왔다. 동력선이 나오기 전에는 ‘해녀배’를 타고 노를 저어가며 물질하러 다녔는데 이때 불렀던 <해녀노젓는 소리>가 전승되고 있다. 이 노동요에는 제주를 비롯하여 진도, 부산 영도, 구룡포 등 해녀들이 거쳐 간 여러 지역 명칭이 나온다.
해녀들은 바깥물질을 통해 벌어들인 재화로 혼인자금을 마련하고 가족의 생계에 보태었으며 재산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출향 전에 받는 전도금(일종의 계약금)이 현지에서 인신 구속과 과잉노동 등의 억압적 상황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제주도에서 출향물질의 경험을 가진 해녀들에게 볼 수 있는 자부심은 이들이 소규모 집단생활을 하며 동고동락하고 제주말과 제주음식을 먹는 등 제주 사람 의 생활양식을 영위하면서 집단적인 경험과 공동체 문화를 이룬 데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해녀 어업은 제주해녀들의 후손들과 출향해녀로부터 영향을 받은 현지의 지방 해녀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2016년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에 등재됨에 따라 현재 전국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 안에 있는 해녀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지역에 정착한 제주 출향해녀들의 역사도 재조명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해녀 인구수는 전체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나 한국해녀의 현대사에서 제주 출향해녀의 자취는 크게 남아 있다. 출향해녀는 달리 출가해녀라고도 한다. 이 용어는 제주해녀들의 입말이 아니라 문헌 등 각종 기록 속에서 지칭되어 온 행정용어다.
제주도의 출향해녀들은 현지에서 마을공동체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으며 어촌 경제에 기여하여 현대 한국 해녀어업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제주해녀들이 정착함으로써 현지에서 제주 출신들의 친목회가 결성되는 등 제주 사람의 정체성과 문화 전승이 이뤄지는 기반이 되었다.


특징과 의의

출향해녀들이 국내외에 제주해녀들의 물질이라는 어로법을 전파, 전승해 전국 각지에 해녀어업의 전승이 이뤄지게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제주해녀들의 출향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폭발적으로 전개된 제주 사람들의 대표적인 이동 양상이다. 또한 현지에 정착한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네트워크를 통해 또 다른 이주가 전개되는 모습은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제주 출향해녀들의 삶과 역사는 곧 제주 사람들의 국내, 해외 이주사와 한국 여성사의 궤적에서 빼놓을 수 없다.


참고 문헌

강대원, 《제주잠수권익투쟁사》, 제주문화, 2001.
제주도, 《제주의 해녀》, 제주도인쇄공업협동조합, 1996. 진관훈, 《근대제주의 경제변동》, 도서출판 각, 2004.
桝田一二地理學論文集刊行會(편), 《桝田一二地理學論文集》, 弘詢社, 昭和51年(1976년). 李善愛, 《海を越える済州島の海女》, 東京:明石書店, 2001.


필자

안미정(安美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