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문화 대백과사전


혁우동맹


정의

해녀항일투쟁의 배후에서 활동했던 구좌면 청년들 의 사회주의 항일운동 비밀조직.


내용

1920년대 제주지역의 청년 항일운동은 일제의 청년 동맹에 대한 탄압 때문에 지하운동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제주청년동맹에서 활동하였던 청년들은 1930년 이후 새로운 형태의 비밀조직에 나섰다. 이 시기 가장 주목되는 비밀조직은 1930년 3월 구좌면 일대에서 결성된 ‘혁우동맹革友同盟’이었다. 혁우동맹은 제4차 공산당에 가입하였던 신재홍이 주도하였다. 신재홍은 1930년 구좌면 세화리 문도배의 집에서 오문규, 강관순, 김성오, 김순종, 김시곤, 부대현 등을 규합하여 혁우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사회주의 이념 하에 민족 해방을 목표로 내걸었던 비밀 결사였다. 혁우동맹의 구성원들은 농민부 신재홍, 청년부 강관순, 소년부 오문규, 소집책임자 김순종 등으로 역할을 분담하여 활동하였다.
혁우동맹원 김순종, 김시곤, 오문규 등은 1930년 8월 구좌면 세화리 해안에 모여서 소년교양에 관한 비밀 협의를 하고 오희평을 그 자리에서 새로이 가입시켰다. 혁우동맹원들은 당시 구좌면지역의 현안이었던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의 해녀 수탈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1930년 9월 20일에는 구좌면 세화리 김시화의 방에 신재홍, 오문규, 김순종, 김시곤, 한향택 등이 집결하여 농촌의 청년과 해녀 규합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1930년 10월에는 신재홍, 한원택, 채재오 등이 모여서 당시 발생하였던 성산포 해녀사건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해녀 문제는 해녀들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해결하도록 유도할 것을 협의하였다. 또한 혁우동맹원 신재홍, 문도배, 강관순, 김순종, 김시곤 등은 1930년 11월 초순에 모여서 향후 사회운동의 방법에 대한 협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맹원 부대현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혁우동맹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자 1931년 1월 하순경 동맹의 해체를 협의하였다. 강창보가 감옥에서 나오자 결국 1931년 4월경에 신재홍, 오대진 등이 문도배의 방에 모여서 정식으로 혁우동맹을 해체했다.


특징과 의의

혁우동맹 해체 후 1931년 5월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사회주의 운동의 세포 조직)가 새로 조직되었고 제주도 야체이카 구좌지역 담당자 신재홍은 1931년 7월 오문규와 문도배를 당원으로 가입시켰다. 문도배는 신재홍·강관순·김순종·김시곤 등과 회합하여 1930년 11월 초순 사회운동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였다. 1931년 후반부 터 해녀들의 관제 해녀조합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에 청년운동가들은 야학을 통해 부녀자들을 지도하여 1932년의 해녀항일투쟁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해녀투쟁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하도리 해녀들은 향리에서 오문규 등의 혁우동맹원들에게 야학교육을 받으면서 항일의식을 배양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야학의 주요 교재는 《농민독본》, 《노동독본》 등이었다고 한다.


참고 문헌

<濟州島事件豫審終決書 (一)>, 《동아일보》, 1932년 12월 11일자.
<濟州島事件豫審終决書 (二)>, 《동아일보》, 1932년 12월 14일자.
<革友同盟을 解體後 地下運動에 着手: 동지중 위험분자 잇다고 해체 組織과 活動의徑路>, 《동아일보》, 1933년 2월 8일자.
제주도, 《제주도항일독립운동사》, 1996.


필자

박찬식(朴贊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