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문화 대백과사전


제주해녀투쟁


〈바람타는 섬〉_강요배 그림

정의

1931~1932년에 일본인 제주도사가 조합장을 겸했던 해녀조합의 횡포에 항의하여 제주해녀들이 벌인 항일 투쟁.


내용

일제강점기인 1920년 제주도 유지들이 비참하게 살던 해녀들을 보호하고자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을 만들었다. 해녀조합은 해녀가 생산한 물건을 공동으로 팔게 하며, 중개는 물론 자금을 융통해 주기 위하여 설립했다. 8천 명이 넘는 해녀들이 너도나도 해녀조합에 가입했고 해녀조합은 해녀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키워주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해녀조합은 출범한 지 10년도 안 되어 서서히 해녀들의 권익을 가로막고 수탈하는 기구로 바뀌어 갔다. 해녀들을 보호해야 할 조합이 오히려 일본 상인과 일본 해조회사 등 일제의 편이 되어버렸다. 당시 해녀조합장은 제주도를 통치하던 일본인 제주도사였기 때문에 해녀들의 어려운 처지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일제의 편이 되어버린 해녀조합은 더 이상 해녀들을 보호하는 조합이 아니었다. 봄철이 되면 육지로 출가물질을 나갔다가 가을에 돌아와서는 제주도 해안에서 작업하는 바쁜 일상 속에서 해녀들은 학교 교육도 받을 겨를이 없이 먹고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배우지 못한 해녀들은 부당한 해녀조합 측에 항의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수탈당하고 있었다.
제주도 동쪽에 있는 구좌면 하도리와 우도는 해녀들이 매우 많은 마을이다. 이 마을 여성이라면 모두 어릴 적부터 물질을 배웠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도리에서 나고 자란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20대 나이에 들어서도 교육을 받지 못하고 해녀 일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녀조합과 일제 당국의 횡포가 심해지자 이대로 눌러앉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항일의식을 가졌던 동네 지식인 청년들의 권유로 당시 하도보통학교 야간부 강습소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녀들은 청년 지식인 교사들로부터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을 받았다. 한글과 우리 역사, 산수, 사회 등을 공부하여 일제 식민지 지배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의식을 깨우치게 되었다. 일제 측 상인들이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 가격을 속이지 못하게끔 저울 보는 법도 야학에서 배웠다고 한다. 부춘화·김옥련·부덕량·고춘효·김계석 등은 같이 공부하여 하도보통학 교 야학강습소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이제 해녀들은 더이상 일제의 횡포를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지 않았다. 1930년 성산포에서 해녀조합의 우뭇가사리 부정판매에 항의하던 하도리 청년들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하도리 해녀들은 일제 당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해녀들은 스스로 해녀회를 조직하여 단결하여 갔다. 해녀회는 성산포와 구좌면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개시했다.
결국 1931년 12월 20일 하도리 해녀들은 회의를 열어 해녀조합에 대한 요구 조건과 투쟁 방침을 확정하고 12월 24일 해녀조합 사무소가 있는 제주읍으로 향했다. 경찰의 제지를 염려하여 발동기선을 타고 제주읍으로 출발했으나 폭풍으로 배가 나아가지 못해 이 투쟁은 실패했다. 결국 본격적인 투쟁은 다음 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1932년 1월 7일 하도리 해녀 3백여 명은 세화리 오일장 날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전개했으나 구좌면장이 나서서 요구 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여 일단 해산했다.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해녀조합에서는 채취 해산물에 대한 지정 판매를 강행했다. 구좌·성산의 해녀들은 각 마을별로 회의를 여는 등 해녀조합에 반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마침 지정 판매일인 1월 12일은 제주도사 겸 해녀조합장인 다구치 테이키田口禎熹가 새로 부임한 뒤 순시하러 구좌면을 통과할 날이고 세화리 장날 이었다. 따라서 구좌면 하도·세화·종달·연평리, 정의면(현 성산읍) 오조·시흥리 등의 해녀들은 시위를 벌이기로 결행 하고 이 기회에 도사에게 요구 조건을 제시하기로 결심했 다.
1월 12일 장날이 되자 세화경찰관 주재소 동쪽 네거리에 종달·오조리 해녀 300여 명과 하도리 해녀 300여 명, 세화리 해녀 40여 명이 일시에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호미와 ‘빗창’을 휘두르면서 만세를 외치며 세화장으로 향했다. 시위대는 세화장에 모여든 군중들과 더불어 집회를 열고 각 마을 해녀 대표들이 항쟁의 의지를 다지는 연설을 차례로 했다. 이때 마침 제주도사를 태운 자동차가 시위대 뒤로 달려오다가 놀라서 구좌면 순시를 포기하고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시위대는 집회를 중단하고 차로 몰려가서 도사를 에워쌌다. 해녀들은 호미와 빗창을 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사태가 험악하여지자 도사는 해녀들과의 대화에 응하기로 했다. 이에 해녀 측에서는 ‘지정 판매 반대’, ‘해녀조합비 면제’, ‘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 항일적 성격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직접 도사와 담판을 벌였다. 결국 도사는 해녀들의 시위에 굴복하여 요구 조건을 5일 내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제주도사가 돌아간 이후 일제는 무장경관대를 출동시켜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34명의 해녀 주동자들과 수십 명의 청년들을 체포하여 버렸다. 심지어 전남 경찰부에서 응원 경관이 파견되기도 했다. 이에 각 마을 해녀들은 심하게 반발했고 26일에는 우도 해녀들이 주동자를 검거하러 온 배를 에워싸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27일 종달리 해녀들이 검거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경찰과 출동하여 진압 해산됨으로써 해녀들의 저항은 진정되었다.

 

제주해녀항일투쟁 일지

 

연월일

투쟁 과정과 내용

배경

1919. 10.

김태호와 제주 유지 소수가 발기인이 되어 조합 추진

1920. 4. 16.

제주도해녀어업조합 설립

1924. 4. 28.

조합 가입 압박: 부산・동래 2개 조합과 울산 5개 조합

해녀조합 이해관계자, 조합장 등 간부 일동 총 사직

1924. 5. 4.

해녀 문제와 6조의 타협책 협의안 구성

1924. 5. 13.

거주지 문제로 해녀조합 분규

1924. 6. 14.

제주도해녀어업조합과 부산어업조합과의 입어분쟁 발생

1927. 5. 6.

경남도 연해 활동의 제주 해녀 중 초과인원 축출

성산포

사건

1930. 9.

성산포에서 해녀조합의 천초 부정판매로 해녀 대표 면위원회 개최, 수천 명의 해녀들이 항의운동 전개, 다나카 제주도사에게 항의

1930. 10. 20.

성산포사건으로 현재성・임춘삼이 경찰에 구류, 해녀들의 봉기

1930. 11. 4.

구좌면・정의면에 관제조합 규탄하는 격문 산포

오문규・부승림・채최선・오동진이 경찰에 체포, 검찰에 송치

하도우도

사건

1931. 6.

해녀조합의 전복 부정판매로 하도・종달・연평리 1천여 명의 해녀들이 2차에 걸쳐서 강력 항의

1931. 12. 24.

하도리 해녀 대표들이 제주읍 해녀조합 사무소를 향한 항의투쟁 추진, 폭풍으로 인해 좌절

1차 시위

1932. 1. 7.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하도리에서 세화리 장터까지 시위, 행진

생복과 감태재 판매의 불이익, 해녀조합의 무책임함 성토

경관, 면지부장, 지부계원, 하도리 구장 등과 교섭 승낙, 요구 전달

2차 시위

1932. 1. 12.

제주도사 초도순시일, 세화 장날-사전 계획 후 실행

동리별 대표 해녀의 불만 11개항 요구, 시위대의 무력행사에 저항

대치검거

1932. 1. 24.

해녀 1,500명의 경찰 차 파괴, 해녀 주모자 34명 검거

1932. 1. 26.

우도 청년 11명 검거, 우도 해녀들의 해상 저지 투쟁

1932. 1. 27.

종달리 해녀 100여 명 피검자 석방 요구 시위

배후수사

1932. 1. 29.

해녀 시위 선동 혐의로 민중협의회원 40명 체포, 탈환운동 대치

1932. 3. 4.

해녀 주동자(부춘화·김옥련·부덕량)를 제외하고 해녀 전원 석방

민중운동자협의회 38명 검속

하도리 9명, 세화리 8명, 연평리 13명, 종달리 8명

석방기소

1932. 4. 22.

해녀 주동자 3명 석방, 비밀결사단체인 ‘민중협회’로 관심 집중

1932. 5. 14.

민중협회 회원 50여 명 중 27명 검거, 목포 압송-유죄로 기소

판결

1932. 12. 11.

제주도 비사(秘社) 사건으로 총 40명 기소

- 치안유지법·가택침입·보안법위반·협박폭력행위

제주도 비사사건 예심종결-병합예심 후 최종 판결

 


특징과 의의

1931년 12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지속되었 던 제주해녀투쟁은 약 17,000여 명이 참여했고 대소 집회 및 시위 횟수가 약 240여 회에 달하는 대규모 시위운동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무수히 많은 항일운동 가운데 제주도에서 일어난 해녀투쟁은 여성들, 그것도 사회적으로 전통 시대부터 천역賤役으로 천시받던 해녀들이 일으킨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해녀투쟁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항일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 문헌

박찬식, <제주 해녀의 항일운동>, 《제주해녀항일투쟁실록》, 제주 해녀항일투쟁기념사업추진위원회, 1995.
현상호, 《제주도 해녀투쟁의 사실》, 1950.


필자

박찬식(朴贊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