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문화 대백과사전


역사적 인물


개관

조선시대 제주목사로 온 지방관을 비롯하여 제주로 유배 온 여러 유배인들이 해녀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이들은 해녀들이 미역, 전복 등의 진상품 마련을 위해 맨몸으로 1년 내내 위험한 바닷속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애처로워했으며 그 안타까움을 시문으로 적어 냈다. 15세기 중엽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기건奇虔은 제주목사 재임(1443. 12.~1445. 12.) 중 제주 사람들이 전복 따는 것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19세기 초 제주목사 허명은 재임(1814. 4.~1815. 5.) 시 해녀들이 미역을 캐는 데에 따른 수세를 없애고 자비전自備錢 900냥을 준비하여 공용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목민관으로 온 제주목사 몇몇은 해녀들에게 부과되었던 과도한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공납할 채복採鰒 값을 상평창의 모전미耗田米로 지급하게 하거나 채곽採藿에 따른 수세 등을 없애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해녀에 대해 처음 기록한 사료로는 17세기 제주로 유배 온 이건이 쓴 《제주풍토기》(1629)가 있다. 그는 바다에 들어가 미역을 채취하는 여자를 ‘잠녀’라 소개하고 있다. 또한 17세기 말 제주목사 이익태의 《지영록》(1695)에는 ‘전복 따는 잠녀’를 ‘채복잠녀’, ‘미역 캐는 잠녀’를 ‘채곽잠녀라 구분 짓고 있다. 18세기 초 제주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1703) <병담범주>에는 용연을 배경으로 둥근 ‘테왁’과 ‘빗창’을 들고 소중의 차림으로 물질하는 잠녀 5명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 옆에 한자로 ‘잠녀’라고 쓰여 있다.
김춘택의 《북헌거사집》(1710) <잠녀설>, 조관빈의 《회헌집》(1731) <탐라잡영>, 신광수의 《석북집》 <잠녀가>(1765), 조정철의 《정헌영해처감록》(1824) <탐라잡영>, 이학규의 《낙하생집》(1819), 이예연의 <탐라팔영>(1832) 등에는 잠녀(또는 채복녀)들의 참상에 대한 애처로움을 시문으로 적고 있다.
18세기 초 이형상은 제주목사 재임 시 제주도의 오래된 여러 폐단을 개혁하고자 중앙정부에 <제주민막장>이란 장계를 올렸다. 남자들을 대신해 진상 미역과 전복을 전적으로 부담해야 했던 해녀들의 신공 외에 공납하는 채복 값을 상평창의 모전미로 지급하도록 하는 등 고충을 개혁하고자 했다.


참고 문헌

송성대, 《제주인의 해민정신》, 도서출판 제주문화, 1996. 제주특 별자치도 해녀박물관, 《제주해녀사료집》, 경신인쇄사, 2009.


필자

김나영(金奈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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