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재건 제주야체이카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도지역에 있었던 사회주의 청년 항일운동 비밀조직.
내용
1930년대 초 청년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직면하여 제주청년동맹 중심의 합법적 활동에서 지하 조직운동으로 전환했다. 청년운동가들은 1930년 9월 10일경에 ‘제주도사회운동자간담회’를 개최했다.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었던 사회운동 지도자 강창보가 1931년 1월 4일 석방되어 제주도로 돌아오자 제주도 내의 사회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청년들은 1931년 5월 16일 조선공산당 재건 제주야체이카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착수하였다. 1928년 국제공산당에서 나온 테제(12월 테제)에 의하여 과거 지식인 중심 운동에서 노동자·농민 중심의 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했다. 6월 14일 사회운동가들은 일본 오사카 운동가들이 작성한 ‘제주도 농민요구투쟁동맹운동에 관한 테제 비판회’를 개최하여 제주도 운동의 노선 및 활동 방침을 확정한 후 각 지역별로 조직의 확대에 주력하고 당시 빈발하던 대중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1931년 말부터 전개되었던 구좌면 해녀들의 해녀조합에 대한 투쟁에도 제주야체이카가 관여하고 있었다. 제주 야체이카의 구좌면 담당자였던 신재홍은 1931년 7월 초순경 오문규·문도배와 회합해 구좌야체이카 조직을 결성했다. 이후 8월 하순경 구좌면 종달리와 하도리 사이 해안 에서 회합한 것을 비롯하여 9월에는 성산포 조선일보 분국에서 10월에는 문도배의 집에서 11월에는 오문규 집에 서 회합하는 등 네 차례의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이러한 모임을 통하여 주로 생산대중을 위주로 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했다. 즉 지금까지의 어용 해녀조합과는 별도로 해녀를 본위로 하고 해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조합과 농민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농민 단체를 조직하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신재홍은 연평리 출신이고 문도배는 세화리, 오문규는 하도리 출신으로서 각각 자기 지역에서 해녀조직과 농민조직을 조직하여 갔다. 특히 1931년 후반부터는 해녀들의 관제 해녀조합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때와 맞물려 해녀들을 위주로 한 이들 구좌면 운동가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운동가들은 부녀자 야학을 통해 해녀들과 연결되고 있었다. 오문규는 하도리에서 야학운동을 매우 활발하게 전개했다. 해녀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전개하기 전에 반드시 운동가들과 협의 과정을 거쳐서 결정했다고 한다. 구좌면의 해녀 문제는 제주야체이카의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1931년 11월에 제주읍 용담리 강창보의 집에서 제주야체이카의 두 번째 회합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강창보·이익우와 더불어 구좌면의 신재홍이 참석해 제주야체이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농민의 조직 문제, 소년 여성 문제, 동아통항조합의 좌익화 및 해소 문제와 아울러 적색구원赤色救援 등에 대하여 협의했다. 해녀운동의 지원 방침도 이 자리에서 결정되었다고 한다. 1932년 해녀항일 투쟁은 해녀들과 이들 운동가들과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전개되어 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주야체이카는 1932년 1월에 일어난 해녀투쟁 사건 관련자의 검속 과정에서 구좌면 운동가들이 대거 검거되자 그 실체가 드러나 버렸다. 일제는 1932년 3월 전도에 걸쳐서 청년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하여 강창보를 비롯하여 운동가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일경은 혹독한 고문을 거쳐서 제주야체이카의 실체를 밝혀 내고 직접 관련자 40명을 재판에 회부하여 최종적으로 22명에게 실형을 언도하였다.
참고 문헌
제주도, 《제주항일독립운동사》, 1996. 후지나가 다케시, <1932년 제주도 해녀투쟁>, 《4·3장정》 2, 제주4·3연구소, 1990.
필자
박찬식(朴贊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