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물질

출가물질_강원도 저도어장_2018_조성익
이칭
바깥물질, 원정물질
정의
19세기 말 이후 제주해녀들이 제주도 밖인 한반도, 일본, 중국, 러시아 등으로 나가서 물질했던 어로작업.
내용
1876년 개항 이후 제주해녀들은 제주도 밖 외지에서 물질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그런 해녀를 ‘고향을 떠나서 작업하는 해녀’라는 의미로 ‘출향出鄕해녀’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해녀들의 작업은 ‘돈벌이 물질을 간다.’는 의미로 ‘출가出稼물질’이라고 하였다.
1876년 개항 이후 선진 어업기술을 갖춘 일본 어민들의 제주도 어장 침탈에 따라 해녀들의 채취량은 현저하게 줄어들어 생존권의 위협을 받았고 결국 이들은 타 지역으로 출가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개항 이후 자본주의화의 영향으로 제주해녀들의 노동이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경남지역에 주로 진출한 일본 해조업자들은 일본해녀에 비해서 작업 능력이 뛰어나고 임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주해녀들을 대거 내륙지방으로 끌어들여 고용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남해안에는 해조류 산지가 산재했는데 지선어장의 어민들이 해조류를 채취하지 않아서 해녀들의 자유로운 어장 이용이 가능했다.
특히 경상남도 기장과 울산은 그 당시 경제적 가치가 큰 우뭇가사리와 미역 어장이었다. 1892년경부터 매년 1~2월경이 되면 일본인 상인들로부터 자금 공급을 받은 객주들이 제주해녀를 모집하여 기장과 울산 어장으로 이동시켰다. 일본인 학자 마쓰다 이찌지桝田一二는 제주해녀가 “이세伊勢 및 일본해녀에 비해서 노동 임금이 저렴하고 비교적 능률이 높고 추위에 강해서 출가해녀들의 수는 해마 다 증가했다.”고 기록했다.
제주 출가해녀들의 채취물은 1900년경부터 일본 무역상들의 등장으로 수요가 증가하여 환금성이 강한 상품으로 여겨졌다. 결국 출가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의 상품가 치가 높아져서 해녀의 소득이 증가했다. 우뭇가사리는 일본에서 가공업이 발달하여 수요가 증가하게 되면서 전복이나 미역보다 경제적 가치가 뛰어난 해조류가 되었다. 제주해녀들이 경남지역으로 많이 진출한 이유였다. 1916년 우뭇가사리 가격은 미역의 66배였으며 1930년대에는 1,033배까지 폭등했다. 우뭇가사리는 식품용(양갱, 잼이나 젤리, 크림, 아이스크림), 공업용(호료용: 견직물의 풀, 의류의 마감용), 도료용(천, 종이, 고무 등의 방수용), 양조용, 인쇄용, 의약용(배독용, 완하제, 고약, 혈액응고저지제), 화장품용, 학술연구용(세균배양용) 등 다양한 용도로 소비되었다. 또한 출가해녀들이 주로 채취했던 감태는 태운 재[搗布灰]를 원료로 삼아 화약, 요오드(소독약)를 만들었다.
제주해녀들의 출가는 1887년 경남 부산의 목도牧島(지금의 영도)로 간 것이 시초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한반도 남부지역뿐만 아니라 북부지역, 일본, 다롄[大連], 칭다오[靑島],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넓어져 갔다. 출가해녀 수는 1910년대에 2,500여 명이던 것이 1930년대로 들어오면 4,000여 명에 달했다. 1929년경 출가 인원은 3,500여 명이고 어획고가 50만여 원인 데 비하여 제주도 내 작업 인원은 7,300여 명이고 어획고는 25만여 원이었다. 해녀들은 매년 4월경에 출가하여 9월까지 활동했는데 해녀가 많이 분포한 구좌면·성산면의 경우 해녀의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절반이나 될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해녀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출가 어로에 나서려고 했다. 해녀 출가가 절정에 이르렀던 1932년에 제주도 해녀조합원의 총수가 8,862명이었는데 그중 57%인 5,078명(일본 1,600명, 한반도 3,478명)이 출가했다. 이와 같이 제주해녀의 출가노동은 일제강점기에 일반 관행으로 정착되었다.
제주해녀_《매일신보》 1916년 8월 3일자 기사_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제주해녀들의 국내 출가 실태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16년 7월 28일 기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주해녀들이 국내 각처로 나간 것은 지금부터 이삼십 년 전(1880~189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당초에는 경상남도 울산· 기장 두 해안에 제한되었으나 지금은 전라남도의 모든 섬, 경상남도 거제도·부산·울산·기장, 경상북도, 강원도, 함경남도, 황해도 연해 각처까지 진출했다.”고 기록했다. 19세기 말부터 부산 영도가 경남·강원·함경도지역으로 출가하는 제주해녀들의 1차 기착지였다면 1930년대부터 어항으로 발전한 경북 울진군 죽변은 동해안을 따라 출가물질 을 나갈 때 중간 기착지였다.
•국내 출가물질: 제주해녀들이 돈벌이를 위해 일정 기간 한반도의 동·서·남해안지역으로 나가서 하는 물질이 국내 출가물질이다. 제주해녀들은 일반적으로 봄에 한반도로 물질 가서 가을 추석 무렵에 제주도로 귀향하곤 했다. 1920년대만 하더라도 제주해녀들이 한반도로 출가出稼할 때는 범선을 이용하여 며칠이고 노를 저으며 갔다.
제주해녀들의 국내 출가물질은 1895년 부산의 영도에 진출한 것을 필두로 동·서·남해안지역에 두루 진출하였다. 1962~1966년까지는 경북지역이 압도적으로 많고 경남, 강원, 전남, 기타 순이다. 1967~1973년까지는 경남지역이 많고 경북, 전남, 강원, 기타 순이다.
1910년에서 1930년대 사이에 국내 출가해녀 수는 2,500~3,000명 정도였다. 해방 후에도 국내 출가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1962년 4,090명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하여 1963~1971년까지는 1,000~2,000여 명이 출가하였고 1972년부터 제주해녀 ‘잠수 출가 안 시키기 운동’이 전개되면서 출가해녀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900여 명 남짓이었다.
제주해녀들의 출가 뱃길은 화탈도, 추자도와 제주해협을 건넌 다음 서해안과 동해안 두 방면으로 나뉘어 갔다. 전라남도 해남이나 목포 또는 서해안 쪽으로 출가할 경우에는 울돌목을 거쳐서 갔고 경상남도 통영·사천지역과 부산 또는 동해안 쪽으로 출가할 경우에는 소안도에서 남해안의 다도해를 따라서 갔다. 조류가 센 화탈도나 사수도 해역에서 선주는 항해의 안전을 빌면서 뱃고사를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출가해녀들은 출가물질 나간 지역에 방을 얻어서 두셋이 함께 자취하며 살았다. 물질을 쉬는 날에는 주인집의 농사일을 돕거나 자신이 캔 소라·전복을 선사하기도 했다. 출가한 지역의 주민들 가운데는 제주해녀에게 호의적인 지역민이 있었는가 하면 적대시하는 지역민도 많았다. ‘보작이년’, ‘제주년’, ‘제주놈’ 하며 차별을 하고 구박을 하였다. 그래서 간혹 지역의 원주민이 중매를 하면 “동녕 바가지를 들렁 동녕질을 해 먹어도 육지놈한테는 안 준다(동냥 바가지를 들어서 동냥질을 해 먹어도 육지놈한테는 안 준다.).”고 말할 정도였다.
19세기 말에 일본의 이세[二世] 해녀들이 울산, 부산, 거제도 등지에 진출했지만 물질 기량이 월등한 제주해녀에 밀려 1929년 이후 이세 해녀들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제주해녀를 모집하는 조선인 객주 뒤에는 일본인 무역상이 있었는데 이들의 중간착취는 가혹하였다. 1920년에는 객주의 중간착취를 배제하고 조합이 어획물을 종합해서 경매를 하거나 어시장에 판매를 위탁하는 공동판매를 목적으로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탄생하였다.
제주해녀들이 권익을 수탈당한 사례는 많다. 1959년 6월 22일자 《조선일보》 기사에는 어장 매매 등 수탈이 심해지자 출가해녀들이 당시 경북포항지방해무청 관내의 구룡포·양포·감포·대보 등의 각 어업조합을 상대로 대구 지방검찰청에 고소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보인다. 1967년 2월에는 경상북도 감포·양포·구룡포 어업 조합장 명의로 제주해녀 1,070명에 대한 ‘입어관행권 소멸확인청구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제주해녀들이 착취당하는 실태는 《중외일보》 1930년 5월 8일 사설로 보도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여러 사람에게 착취당한 후에야 해녀들 몫이 남는다는 의미의 “열두 놈 ᄒᆞᆫ착 먹어사 ᄌᆞᆷ수 ᄎᆞ지 온다(열두 놈 한쪽 먹어야 잠수 차지 온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제주해녀의 수익 침해는 심각하였다.
•국외 출가물질: 제주해녀들이 돈벌이를 위해 일정 기간 해외로 나가서 하는 물질이 국외 출가물질이다. 제주해녀의 국외 출가시기는 1903년에 일본 도쿄의 미야케지마[三 宅島]로 진출한 것을 필두로 중국 칭다오[靑島]에는 1935년부터 출가하였다. 칭다오에는 80여 명이 다롄에는 20여 명 정도가 출가했다. 어장 상황에 따라 황해도지역에서 물질하던 해녀들은 중국의 칭다오나 다렌 등지로 진출했고 함경도 청진지역에 물질하던 해녀들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진출하기도 했다. 제주해녀의 국외 출가지역은 일본은 쓰시마[對馬島]·시즈오카[靜岡]·고치[高知]·나가사키[長崎]·미에[三重]·도쿄[東京]·에히메[愛媛]·도쿠시마[德島]·가나가와[神奈川]·가고시마[鹿兒島]·시마네[島根]·지바[千葉] 등지였다. 중국은 칭다오·다롄 등지였고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지역인데 1920~1930년 대의 경우 5천 명 내외에 이르렀다. 이들 국외 지역으로의 출가물질은 해방 후부터 단절되었다.
중국 다롄으로 갈 때는 발동선을 타고 갔고 일본 쓰시마로 가는 경우는 대부분 범선을 타고 갔지만 부산에서 ‘다마무라’라는 연락선을 타고 쓰시마로 출가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부정기적으로 일본에 출가물질을 나간 경우도 있다. 《제주신문》 1975년 6월 11일자 기사에 “해방 후는 외국 진출의 길이 막혔다가 1969년 일본 코치현[高知県] 무로토시[室戶市] 다카오카[高岡]어협 초청으로 26명이 출가하여 5개월 동안에 평균 26만 원을 벌어들인 적이 있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출가해녀의 진출 지역_해녀박물관 제공
1923년에는 제주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직행 항로가 개설되었는데 이는 제주해녀들의 일본 출가물질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오사카에 도착한 제주해녀들은 오사카만 내 혹은 간사이[關西] 연안에서도 물질을 하였다. 오사카항에서 제주해녀가 조업을 시작한 것은 1930년경이 다. 제주해녀 한 사람당 여름 한철 벌어들인 액수가 1,000엔이었다고 한다.
1934년 6월 23일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기사에 “조선 해녀들은 고베[新戶]항을 비롯하여 바닷속에 들어가서 해삼이나 우뭇가사리를 채취하고 있다가 해저에 많은 고철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발견, 그것을 인양해 1엔 50전부터 2엔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소문을 최근에 전해들은 40~50명의 조선인 해녀가 본적을 잊어 고철 줍기에 정신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만주전쟁을 일으켜 군수공업이 성하던 시대 상황에 맞춰 제주해녀들이 채집 대상을 넓혀 간 사례 중의 하나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주도에서는 해마다 출가하는 해녀 수가 증가했고, 1934년 말에는 제주도 인구의 5분의 1이 일본에 거주할 정도였다. 제주해녀의 어장도 일본 북쪽에서 남쪽까지 뻗쳐 있었다.
제주해녀들이 복용하는 ‘노신’은 일본 출가해녀들에 의해 제주에 알려졌다. ‘노신’은 1918년 일본의 아라쿠스 제약이 출시한 의약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46년 10월 1일 의약품 제조 허가를 받은 동아제약이 ‘뇌선’을 출시하였다.
특징과 의의
제주해녀들의 출가물질은 여성의 경제적인 능력을 발휘한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노동 형태라 할 수 있다. 험한 바다에서 목숨을 담보로 가족을 위해 노동을 했던 제주해녀들의 삶에 대한 집념은 여성사의 중요한 대목으로 기록될 만하다.
참고 문헌
강대원, 《제주잠수권익투쟁사》, 제주문화, 2001.
김수희, <일제 시대 남해안어장에서 제주해녀의 어장이용과 그 갈등 양상>, 《지역과 역사》 21, 부경역사연구소, 2007.
박찬식, <제주 해녀의 역사적 고찰>, 《역사민속 학》 19, 한국역사민속학회, 2004.
이성훈, 〈국내 출가해녀〉, 《제주여성사Ⅱ: 일제강점기》, 제주발전연구원, 2011.
이지치 노리코, 〈국외 출가해녀〉, 《제주여성사Ⅱ: 일제강점기》, 제주발전연구원, 2011.
필자
박찬식(朴贊殖), 이성훈(李性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