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동 해신사 해신제

화북동 해신사 해신제_화북동_2023_강소전
이칭
도제
정의
제주시 화북동의 해신사海神祠에서 화북동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마을과 어업의 무사 안녕을 위하여 음력 1월 5일에 지내는 유교식 의례.
역사
화북동은 고려시대부터 별도현으로 기록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졌다. 화북포구 역시 연륙포구로 제주도의 대표적인 해상 관문이었다. 화북포구에 있는 해신사는 조선 후기 관에서 설립한 유교식 해신제海神祭 사당이다. 이원조의 《탐라록》, 일본동경대학 소장본의 《탐라지》(작자·연대 미상, 1848년 이후 추정), 김석익의 《탐라기년》, 담수계 편의 《증보탐라지》 등의 문헌을 통하여 해신사의 창건과 중수, 위패와 제일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해신사는 순조 20년(1820)에 한상묵 목사가 화북포구에 설립하였다. 헌종 7년(1841)에 이원조 목사가 해신사를 중수하였고, 사당의 현판도 손수 써서 걸었다. 헌종 15년 (1849)에는 장인식 목사가 돌에 ‘해신지위海神之位’라고 새겨 위패를 모셨고, 매년 음력 1월 6일로 제일을 고정하였다. 해신제는 182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약 100여 년 정도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953년에 편찬된 담수계의 《증보탐라지》에서 해신사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금폐今廢’라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의례가 폐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내용
화북동은 제주시 내 동북부에 위치한 해안 마을이다. 해신사는 화북동 속칭 ‘금돈지’ 포구에 있다. 해신의 신위는 사당 안에 비석을 세워 모셨다. 사당 옆에 제주도 기념물 22호(1973년 4월 3일 지정)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해신사는 2회에 걸쳐 이전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1950년 대 말에는 현재 ‘은영수산’이 위치한 삼거리에 돌 위패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 초반 포구로 위패를 옮겨 해신사를 다시 지었다. 이때 마을 주민인 서예가 청탄 김광추(1905~1983)가 직접 글씨를 써서 ‘海神祠’라는 현판도 달았다. 나중에 금돈지 포구가 개발되면서 1975년에 해신사를 현재 위치인 포구 안쪽으로 이전하였다.
해신사 해신제_화북동_2024_제주학연구센터
화북동은 해안 마을이니 해신에게 어업 활동의 무사 안녕과 생업 풍요를 기원하였다. 여기에 화북포구가 예부터 대표적인 해상 관문이었기 때문에 관원과 물자의 이동이 있을 때마다 해신에게 제를 드렸다. 사실 해신사의 해신은 화북마을의 전통적인 해신당 신앙과도 관련 있다. 해신사 설립 이전부터 금돈지 포구의 해신당에서 ‘금돈지 해신 영감’과 ‘해신부인’을 모시고 있었다. 당의 본풀이에는 제주 목사가 들어오면 해신당에 가서 이름을 올렸다고 전한다. 해신사의 유교식 해신제는 일정 기간 동안 폐지되어 있었다. 1950년대 말에는 해신사 위패가 남아 있어도, 실제 해신제는 포구에 있는 과거 일본식으로 지었던 기와 집 건물에서 어촌계가 주관하여 지냈다고 한다.
해신사의 해신제가 다시 거행된 시기는 1960년대 초반 부터다. 포구에 해신사를 다시 건립하고 위패를 옮겨 모셔 비로소 과거처럼 해신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도 해신제는 어촌계에서 계속 주관하여 지냈다. 1970년 대에 해신제를 지낸 양상을 보면 제일이 음력 1월 5일로 바뀌었다. 해신제의 제일이 언제 어떻게 변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을 원로들은 해신제가 예부터 5일에 지내던 것이라고 알고 그대로 전승하였다. 또한 해신제는 어촌계를 중심으로 치렀다.
1980년대에도 같은 방식으로 해신제를 하였지만 그 위상은 좀 달라졌다. 어촌계가 주관하되, 그 범위는 마을 차원으로 넓어졌다. 그러니 제관도 마을 전체에서 각 자연 마을별로 선정하였다. 특히 1980년대 후반에는 해신제의 양상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어촌계가 주관해서 지내던 해신제를 마을제 차원에서 치르기로 방향이 바뀐 것이다. 따라서 축문도 마을제의 내용을 담는 것으로 바뀌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다시 어촌계로 주관이 넘어갔지만, 제관은 마을에서 선정하였고 마을제로서 성격은 계속 유지하였다.
2005년부터는 어촌계에서 화북1동 마을회로 주관이 다시 바뀌었다. 마을제로서 위상이 확실히 굳어졌기 때문이다. 마을제로는 해신제가 유일하다. 각 자연마을의 유교식 포제가 있었으나 이미 1960년대에 중단되어 버려서 마을에서 해신제가 가지는 위상이 더욱 소중해졌다. 따라서 화북1동 마을회에서 주관하여 동마을, 중마을, 서마을 세 마을의 회장들이 돌아가면서 제관을 맡고 해신제 준비를 하였다.
한편 2017년 12월 29일에 <제주특별자치도 해신제 봉행위원회 지원 등에 관한 조례>(제2001호)가 제정되면서 해신사의 해신제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조례 제정 이후에 주민들은 해신제를 ‘도제道祭’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2018년부터 해신제봉행위원회가 중심이 되었다. 제관 수도 늘어 모두 12명을 두었다. 과거 19세기처럼 관에서 지냈던 모습이 다시 만들어졌다. 해신제는 오전 10시에 시작한다. 창홀唱笏, 참배례參拜禮, 전폐례奠幣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망예례望瘞禮의 순서로 진행한다. 그런 다음 삼헌관이 해신사 밖으로 나가 포구 끝까지 가서 종이에 싼 제물을 바다로 던지는 고수레를 하고 마친다.
특징과 의의
조선 후기 관에서 설립한 해신사라는 유교식 사당에서 해신제를 지낸 사례는 제주도 내에서 화북동이 유일하다. 해신사는 금돈지 포구의 해신당과 깊은 연관을 가지며 화북포의 신앙을 형성하였다. 한상묵 목사가 기존의 금돈지 해신당을 기반으로 하여 유교식으로 이를 재편 하고자 해신사를 지었고 해신제도 유교식으로 지냈다. 20세기 초반 무렵에 해신사의 해신제가 폐지되자 주민들은 자연히 이전의 신앙 형태로 돌아갔다. 해신당과 해신사가 서로 공존하며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전환하는 모습에서 무속의례와 유교의례의 습합 양상도 드러난다. 물론 근래에 들어서는 다시 유교식으로 해신사가 되었다. 한편 해신제 외에 마을 어부들은 해신사에서 각자 따로 제를 지내고 있다. 해신제가 마을제로 변화하였어도 어업활동을 하는 이들과 관련된 성격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참고 문헌
강소전, <해신사와 해신제의 역사와 변화>, 《도지정기념물 화북진성 복원계획 및 주변 문화유산 활용계획 수립 보고서》, 제주시·제주문화예술 재단, 2011.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의 마을신앙: 제주특별자치도》, 2023.
필자
강소전(姜昭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