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문화 대백과사전


해녀 아들 송중이


정의

소섬의 북쪽에 위치한 주흥동周興洞 마을의 지명 유래담.


내용

소섬에 부부가 살고 있었다. 아내는 물질을 하고 남편은 미역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미역 장사를 나갔다 돌아오다가 큰바람을 만나서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죽었다. 아내는 ‘똥배질은 예펜’이란 별명으로 불렸는데 물질을 너무 잘해서 다른 사람의 세 갑절씩이나 전복, 소라, 미역 등을 해오곤 하였다. 하지만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우울한 날을 보냈다. 해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기피하여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홀로 물질을 하곤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과부 해녀는 혼자 떨어져서 물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해녀들이 물질을 하다 가 문득 과부 해녀가 물질하는 곳을 보니 물 위에 두렁박만 떠 있고 오래도록 사람이 물 위로 나타나지 않았다. 전복을 못 따더라도 물숨을 아껴서 여유가 있을 때 물속에 서 나오지 않고 욕심을 부리다가는 죽을 수도 있기에 해녀들은 과부 해녀가 물숨을 먹어 죽은 것이 아닌가 걱정하였다. 해녀들은 두렁박 있는 곳으로 헤엄쳐 가서 과부 해녀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호오이’ 숨비소리가 들리고 뒤에는 처량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과부 해녀가 헤엄쳐 떠오르더니 울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해녀들에 이끌리어 바닷가로 나온 과부 해녀는 실신하고 말았다. 해녀들은 실신한 해녀의 팔과 다리를 잡고 잔디밭까지 옮겨놓았다. 그제서야 자세히 보니 수경도 없고 머리에 썼던 수건도 없어지고 머리까지 짧게 잘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심방을 데려다 한참 빌었더니 실신했던 과부 해녀는 눈을 뜨고 살아났다. 그제야 수경이 없어지고 수건도 없어지고 머리까지 단발된 까닭을 물었다. 과부 해녀는 전복을 찾아 자맥질하여 바닷속에 들어가니 바다 밑에 놋잔 두 개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상히 여겨 그것을 건지려고 하니 놋잔이 있는 바다 밑이 갑자기 사람이 사는 구들(방)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 방은 아랫 마을 어느 점방과 똑같았고 앉아있는 사람도 바로 그 점방 주인이었다고 했다. 점방 주인은 “이제 당신은 나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면서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사코 피하려고 하자 “이제 당신은 나를 피할 수 없소. 이것이 증거요.” 하면서 머리를 잘라서 가지더라는 것이다. 바닷속에서 머리가 잘린 이야기를 할 때 해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이 일이 있은 후 해녀는 몸이 성치 않아 시름시름 앓았다.
과부 해녀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하나는 일본으로 가고 하나는 죽어버려 홀로 외로운 몸인데 바닷속에서 머리 잘린 일이 있은 후부터 몸이 성하지 못하니 사나흘에 한 번씩은 심방을 데려다 빌었다. 심방이 다녀가면 아프다가도 팔롱(번뜩) 정신이 나곤 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과부는 잉태하게 되었다. 원래 ‘똥배질은 예펜’으로 불릴 정도로 뚱뚱했으므로 똥배가 나왔으려니 해서 이웃에서는 눈치채지 못하였다. 과부는 사람들이 알기 전에 마을을 떠나려고 벼르다가 소섬 해녀들이 대마도 출가물질을 나갈 때 해녀들을 따라 마을을 떠났다.
해녀는 대마도에서 아들을 낳고 이름을 송중이라 지었다. 부끄러워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대마도에서 7년을 살고 돌아와서는 일곱 살이 된 아들을 송씨 심방에게 맡겼다. 자손이 없던 송씨는 송중이를 호강스럽게 애지중지 키웠다. 그러다 보니 송중이는 섬에 살면서도 헤엄칠 줄을 몰랐다.
어느 날 송중이는 이 마을에 있는 큰 물통에서 나뭇잎으로 배를 만들어 물 위에 띄우며 놀고 있었다. 나뭇잎배가 바람에 불려 깊은 데로 떠가자 송중이는 배를 잡으려고 돌을 밟아 디디며 가운데 쪽으로 갔는데 돌이 구르는 바람에 그만 실족하여 물에 빠지고 말았다. 송중이는 헤엄칠 줄 몰라서 이쪽저쪽으로 기우뚱거리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송중이가 헤엄 연습을 하는 줄 알았다. 아이들은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송중이를 보고 곰세기(돌고래) 춤을 춘다고 손뼉 치면서 “송중이 잘한다, 잘한다.” 하고 외쳤다. 송중이는 물을 많이 먹고 기진하여 물속으로 잠기고 말았다. 아이들은 그제야 “중이 빠졌다! 중이 빠졌다!” 하고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웃 밭에서 어른들이 김을 매고 있었으나 중이(쥐)가 빠진 줄 알았다. “중이 빠지나마나 놔둬라.”, “일이 힘든데 중이 쫓으러 갈 사람이 어디 있나.” 하면서 김매기에 바쁜 여자들은 외면하였다.
송씨는 뒤늦게야 아들이 물에 빠져 죽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녀들을 동원하여 시신을 건져 올려 장사를 지냈다. 송중이가 죽자 원통한 날을 보내던 송씨 심방은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없어 죽었다. 송중이 어머니는 아들의 원을 풀어주기 위해 심방이 되어 살다가 죽었다.
이 마을은 송중이의 슬픈 익사 사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중개’라고 불렀는데, 이를 한자식으로 표기하면서 ‘주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특징과 의의

우도 주흥 마을의 지명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송중이와 그 어머니인 해녀의 슬픈 사연이 소섬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다. 바닷속 놋잔과 단발 사건, 송씨 심방과의 인연, 송중이 익사 사건을 통해 마을의 설촌 역사, 심방의 존재와 역할에서 해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틋하고 슬픈 해녀의 일생이 마을의 역사를 이루는 구심점이 되고 일반화되면서 전승되어 온 점이 흥미롭다.


참고 문헌

우도지편찬위원회, 《우도지》, 1996.
제주대학교탐라문화연구소, 《제주도부락지(Ⅲ)》, 1990.


필자

양영자(梁永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