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벌립장

정동벌립은 제주의 뜨거운 햇살과 잦은 소나기 등을 막아줄 수 있는 필수적인 모자로 자리 잡게 된 생활재이다.

©정동으로 만든 관광모자

남쪽나라 제주도는 천혜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강한 햇살과 바람, 습기와 화산회토(火山灰土) 토양 등으로 인해서 이곳에 정주해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척박하고 힘겨운 생존의 노력을 해야 하는 땅이다. 정동벌립 역시 제주의 뜨거운 햇살과 잦은 소나기 등을 막아줄 수 있는 필수적인 모자로 자리 잡게 된 생활재이다. 정동벌립은 시원하고 질기며 물을 먹지 않아 예전에 농사 지을 때 띠풀로 만든 우장과 함께 사용되었다. 농부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말의 고장이었던 제주는 한라산 기슭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누비며 말과 소를 돌보았던 테우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필수장비 중 하나가 정동벌립이었다. 30여년 전부터는 그 변형으로 모자가 제작되어, 일명 ‘관광모자’로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여러 형태로 개발한 정동벌립

제주의 ‘정동벌립(정당벌립)’은 농부나 테우리(목자)들이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제주도 고유의 것이다. 정동벌립은 ‘정동’ 곧 ‘댕댕이덩굴’을 재료로 하여 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으로 만든 모자이다. 댕댕이덩굴은 방기과의 낙엽활엽 덩굴식물로 들판이나 숲가에서 자라며, 한방에서는 치열(治熱)·사습제(瀉濕劑)·신경통·류머티즘 ·수종(水腫)·이뇨 등에 사용한다. 제주도 한라산 서쪽 지역에서는 댕댕이덩굴을 ‘정동’으로, 동쪽 지역에서는 ‘정당’으로 부르고 있어 정동벌립 또는 정당벌립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제주의 들녘은 넉넉하고 풍요롭다. 사계절 수많은 야생의 풀들이 지천으로 자랐다. 제주 사람들은 오름과 들녘에 풍성하게 자라는 야생의 풀들을 오랫동안 생활에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해 왔다. 다른 지역에서 볏짚으로 만든 생활 용구가 서민들의 삶과 같아 했다면 제주의 삶은 야생풀과 함께 엮어진 것이었다. 그 야생풀 중의 하나가 정동이었다. 정동으로 모자를 만들었고, 반짇고리나 찬통, 바구니 등 여러 가지 공예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제주의 전통 모자인 정동벌립의 기원은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 제주의 진상품 가운데 전모가 있었는데, 전모는 봄이 되면 털갈이를 하는 소나 말의 털을 재료로 해서 갓 모양으로 만든 모자다. 화살도 뚫지 못한다고 할 만큼 단단했던 전모는 털벌립이라고도 불렸으며 그 전모를 그대로 본떠 정동(댕댕이덩굴)을 엮어서 만든 것이 바로 정동벌립이다. 1702년에 제주목사 이형상의탐라순력도를 보면 목장의 말 상태를 점검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여기에 는 말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테우리들이 정동벌립을 쓰고 있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거친 초원에서 말이나 소를 돌보며 살아가야 했던 테우리들에게 정동벌립은 그냥 단순한 모자가 아닌 필수 장비였다. 드넓은 산야에서 마소떼를 몰거나 마소떼를 찾아 헤맬 때 뜨거운 햇볕과 사나운 바람을 막아주었던 것이 정동벌립이었다. 대패랭이보다 부드러우면서도 질기고 빗물을 머금고도 모자의 형태가 조금도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혹독한 눈보라를 막아주기도 했다. 정동벌립은 습기가 많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곶자왈이라는 제주의 특이한 환경에 가장 적합하고 이상적인 모자인 것이다.

그 모양을 살펴보면 조선 시대 갓의 형태로 물 한 방울도 스며들지 않도록 촘촘하고 섬세하게 짜여져 있는 데다가 차양이 어깨를 가릴 만큼 넓다. 정동벌립은 비와 눈보라를 가리는 우산 역할, 곶자왈의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가게 하는 방패로도 사용되었던 여러 가지 기능을 두루 갖춘 실용성이 다양한 모자인 것이다. 정동벌립에는 자연이 키워낸 풀잎 하나도 슬기롭게 생활에 이용했던 제주인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정동벌립의 제작은 예전부터 한림읍 귀덕1리 성로동(城路洞)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정당벌립이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어떻게 한림읍 귀덕1리에서 집중적으로 전승되어 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제주특별자치도 무형유산 기능보유자 홍만년 씨의 경우 그의 증조부 때부터 며느리까지 5대째 그 기능이 전승되고 있어 그 연원을 최소한 15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듯하다.

©정동벌립

일제강점기 때만 하더라도 성로동 안에는 ‘벌립청’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남자들만이 모여서 정동벌립을 결었다. 벌립청이란 주민들 여럿이 모여서 ‘정당벌립을 겯는 곳’이란 뜻으로, 1930년대만 하더라도 성로동 안에 일곱 군데나 있었다고 홍만년 씨는 회고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거의 가가호호 마다 정동벌립을 결었는데, 일제강점 말기에 이르러 공출이 심해져가자 이를 결을 만한 겨를이 없어서 급격히 줄어들었다 한다. 이후 명맥이 근근히 이어지다가 1990년대 관광객이 급증하고 수요가 늘면서 정동벌립과 정동모자 겯는 일은 귀덕1리 성로동에서 총 60여 가구 중 55가구에서 100여명 이상이 이 일에 종사할 정도로 활발하게 전승되었다. 또한 중동네, 알동네 등으로 확산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귀덕리에 살던 사람이 다른 마을에 이주하거나 출가하게 됨에 따라, 또는 인척관계에 따라 전승되거나 전파되면서 제주시 다호마을이나 서귀포시 일부지역에서도 정동벌립을 만들기도 하였다.

©정동 줄기

정동벌립의 재료인 정동 줄기의 최상품은 동부지역의 송당과 교래, 대천동, 서부 지역의 광평·금악의 목초지 등에서 자란 것이다. 굵기가 일정하고 마디와 마디 사이가 길어서 부드럽다는 장점이 있다. 정동 줄기는 추석이 지난 후에 채취해 비는 피하고 이슬은 맞히며 햇빛과 수분을 알맞게 배합하며 말린다. 약 25일 정도 말리면 진한 갈색으로 아름다운 빛깔을 띠게 된다. 같은 굵기끼리 골라서 둥글게 말아서 보관하여 두면 오랜 후에도 사용할 수 있고 짤 때도 잘 부러지지 않으며 모자의 수명도 길다. 최근에는 정동을 구하기 쉽지 않아 송월순 및 홍양숙 전승교육사의 경우, 씨를 받아와서 직접 재배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정동 씨앗

정동벌립장 기능보유자 홍달표 씨는 재료를 구하기 위해 젊었을 적에는 중산간 초지를 누비고 다녔지만, 지금은 전문적으로 걷어오는 사람에게 구입한다고 한다. 제주도 동쪽의 교래 벌판이나 송당의 목초지, 안덕면 광평리의 드넓은 목초지에서 채취한 정동줄은 마디 사이가 길고 굵기도 비교적 일정하다. 구좌읍 송당리 대천동에 가서 집을 빌어 잠을 자면서 정동줄을 걷어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정동줄은 마디와 마디 사이가 길수록 부드럽고 재료로써 더 가치가 있다. 채취한 정동은 잎과 곁줄기를 떼어내어 다듬은 다음 감아서 말린다. 이때 비를 맞으면 정동에 찰기가 없어지기 때문에 정성을 해야 한다. 또한 밤 이슬을 맞혀 햇볕과 수분을 골고루 배합하며 자연상태로 말리면 초원을 품은 갈색의 빛깔로 건조된다. 이렇게 자연의 바람과 햇볕, 이슬에 말려진 정동을 둥글게 말아서 간수해 두면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어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정성을 들여 만든 정동은 다시 물에 담가 불려 부드럽게 만든다. 정동벌립을 만들 때 부러지지 거나 잘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부드러워야 한다. 물에 담갔다가 눈그물로 훑어내면 비로소 정동벌립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

©정동벌립 제작도구

굵은 줄은 날로 쓰고 중간 굵기는 천(차양), 가는 것은 망(옆면)으로 짠다. 정동벌립을 만드는 도구는 송곳과 마침바농, 가위, 밀림대, 칼 등이 쓰인다. 밀림대는 ‘다의개’라고도 하는데, 모자를 촘촘하게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이며, 송곳은 날을 주기 위해 정동줄을 벌려주는 도구이다. 펜치는 날을 자르는 도구이며, 칼은 부속물 나온 것을 잘라주고, 자는 모자의 규격을 맞출 때 사용한다. 마침바농은 우산 살을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송곳에 홈이 파여있고 날과 날을 이어줄 때 사용한다. 눈그물은 멸치 그물의 조각으로 줄기에 붙은 잎이나 가지의 흔적을 매끈하게 훑어내는 데 사용한다. 밀림대는 목수용 티자를 알맞은 길이로 잘라서 만든 것으로 양쪽에 송곳니처럼 날이 서있다.


정동벌립은 절벤(모자의 정상부, 상판)·망(높이)·천(차양 부분)의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정동벌립 만들기 역시 상판(젤벤) 짜기, 옆면(망) 짜기, 차양(천)짜기 등 크게 세 가지 공정으로 진행된다. 보통 완성까지 품질에 따라 짧게는 6일에서 길게는 20일 정도까지도 걸린다. 말린 정동 줄은 반드시 물에 푹 잠기게 담가서 부드럽게 불린 후에 물기를 빼고 촉촉한 상태에서 짜야 한다. 정동벌립의 종류는 양태나 탕건처럼 뚜렷한 구분이 없이 대체로 차양 부분의 도리수에 따라 구분한다. 한 도리는 한 바퀴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최상품은 가장 섬세한 정동 줄로 짠 것으로 약 100도리 정도, 상품은 90도리, 중품은 80도리, 하품은 70도리 정도를 친다.

첫 번째 공정인 상판 뜨기는 ‘가마귀방석’이라 부르며 모자를 썼을 때 정수리 부분에 해당되는 곳이다. 옛날에는 정동벌립을 상투를 튼 머리 위에 얹는 형태로 썼기 때문에 모자 부분이 좁았다. 그래서 네 가닥으로 엮었으나 요즘은 모자통이 커지면서 여덟 가닥으로 엮는다. 날줄 두 개로 가마귀방석(불가사리의 제주어)을 여덟 도리 정도 짠 후 날개를 늘리면서 절벤을 짠다. 절벤은 절편(떡)에서 따온 것이라 하나 분명치 않다. 절벤은 날을 많이 줄수록 촘촘한 예쁜 모자가 된다고 한다. 사갑바위에 갈 때까지 평면으로 만들어주고 그 이후부터는 둥글게 구부려 내려간다. 구부려 내려가는 과정이 모자의 크기를 맞추는 과정인 셈이다. 벌리면 모자가 커지고 좁히면 작아지기 때문에 정확히 크기에 맞게 엮기가 쉽지가 않다. 모자의 가운데 열십자 모양의 네 개로 된 것이 가마귀 방석이다. 절벤은 가마귀방석을 엮은 다음 연결되는 모서리 쪽까지 평평한 부분이다. 절벤의 날 수는 보통 80개이며 처음에는 한 가닥의 날로 결었으나 지금은 두 가닥의 날로 결고 있는데, 이는 하나일 때보다 빨리 결어질 뿐 아니라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절벤이 다 결어지면 날 수를 늘리면서 정동줄 세 줄로 망을 짠다. 이전에 사갑바위를 짜는데 사갑바위는 절벤과 망(옆면), 망과 천(차양)의 경계 부분으로 네 개의 날(사오리)로 엮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망은 사갑바위를 경계로 절벤 다음에 이어진 부분으로 머리가 쏙 들어가는 부분이다. 대략 망의 날 수는 절벤의 두 배로 160개 정도이다. 정동벌립의 망은 머리 크기에 따라 달리하는데 보통 12센티미터 정도이고 천은 약 15센티미터 정도의 크기로 짠다.

망이 완성되어 천으로 들어가려면 날을 꺾어주어야 하는데, 날이 말랐을 경우 부서져버리기 때문에 조심히 꺾어주어야 한다. 망이 다 짜여지면 망과 천을 이어주는 사갑바위를 4줄로 5~6도리 튼튼하게 짠다. 망과 사갑바위 공정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천을 짜게 되는데 천은 사갑바위를 경계로 망 다음으로 이어지는 평평한 부분이다. 천은 햇볕을 가려주는 넓은 차양이다. 날대를 꽂아가며 세 줄로 짜는데 그 날 수는 망 날 수의 두 배 정도인 320개 정도이다. 천의 끝부분을 마무리하는 것을 바위돌림이라 하는데, 짜다 남은 정동줄을 잘라내어 감춘다. 모자가 완성되면 무명실을 꼬아 끈을 만들어 단다.

정동벌립은 무늬가 없이 삼오리(세 개의 날)로 엮으며 절벤과 망, 망과 천의 경계는 사오리(네 개의 날)로 엮어 촘촘하므로 비가 새지 않는다. 또 천(차양)이 넓어 머리에 얹으면 비를 피하고 햇볕도 가리는 등 실용적이다. 반면 요즈음 만드는 정동모자(관광모자)는 두 날로 엮는데다 무늬를 넣으며 차양이 좁아 멋으로 사용할 뿐 비를 막을 수는 없다. 실처럼 가는 줄기로 짜인 정동벌립을 쓰면 억수 같은 비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강렬한 햇볕을 막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곶자왈의 가시덤불을 만나면 정동벌립의 넓은 차양은 방패가 돼주었다. 무성하게 자란 수풀이나 나뭇가지가 정동벌립에 닿으면 미끄러져서 걸리지 않으며 머리나 얼굴이 가시에 긁혀서 상처가 나는 것을 막아주었다. 이 모자는 한번 마련하면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아들까지 3대가 사용한다고 할 정도로 튼튼하고 수명이 길다.

1986년 4월 10일 정동벌립장으로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 1578번지(현재의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 홍만년(洪萬年, 1910년생)이 지정되었다. 홍만년의 가계는 증조부 때부터 정동벌립 일에 종사해 왔다. 일찍이 기능을 익힌 그는 해방 후 햇볕을 막기 위한 중절모자 형태의 정동모자를 겯기 시작하였고, 점차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1대 보유자 홍만년에 이어 2대 보유자로 홍달표가 2000년에 지정되었다. 2022년에 고령으로 그 기능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명예보유자가 되었다. 2002년에 송월순(여, 1952년생)과 홍양숙(여, 1961년생)이 전승교육사로 인정되었다. 송월순은 애월읍 금성리 출신으로 귀덕리 홍만년 댁 며느리로 시집오면서 정동벌립 기능을 전수받았고, 홍양숙은 한림읍 귀덕리 출신으로 큰아버지인 홍만년으로부터 정동벌립 기능을 전수받았다. 귀덕리를 중심으로 두 전승교육사와 안인옥, 홍예지 전수장학생 등이 함께 전승을 이어가고 있다. 대외 활동으로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시회, 돌문화공원 전시회, 탐라문화제 및 무형문화대전 시연 등을 통해 정동벌립의 전승 보전에 힘쓰고 있다.

[참고문헌]
제주특별자치도, **증보판 제주의 문화재**, 1998.
제주특별자치도, **증보판 화산섬 제주 문화재 탐방,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