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노래

제주특별자치도 무형유산인 해녀노래는 바다에서 물질 작업을 하던 해녀들에 의해서 불려진 어업노동요다.

한반도의 남쪽 제주도는 천혜의 아름다운 경관이 깃들어 있는 곳이지만, 과거 제주 사람들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메마른 땅, 세찬 바람, 게다가 해마다 물난리를 겪어야만 했던 그야말로 척박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제주 사람들은 이러한 모진 환경과 아픈 역사에 굴하지 않고 때로는 맞서고 때로는 순응하면서 생존의 지혜를 펼쳐왔다.

제주민요는 제주 사람들이 이러한 환경을 극복해온 옹골찬 삶의 반영이자 역사이다. 척박한 환경을 일구어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숨을 토해내듯 불렀던 제주민요는 제주 사람들의 삶의 질곡을 엮은 대서사시이다.

땅이 척박해 농사짓기 힘들었던 제주 사람들은 거친 바다를 배경으로 삶의 터전을 일구어 왔다. 따라서 제주에서 어업노동은 비좁고 척박한 땅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의 개척지로써 바다로 나아갔다.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을 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력을 이용한 잠수어업은 1920년대 일제 강점기 이후 해산물의 일본 수출과 함께 제주 여성의 대표적인 노동이었다.

제주 해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바다에 나가 물질 작업을 하였고, 어부들은 멸치잡이나 갈치잡이를 하였다. 이렇게 일찍이 어업이 발달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어업노동요도 불려졌다. 하지만 어업노동의 비중에 비해 해녀노래를 제외하면 실제로 어업노동요는 육지지방에 비해 그 종류가 많지 않은 편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어업노동요로는 해녀노래, 멸치후리는노래, 테우노젓는노래, 갈치낚는노래 등이 있다.

어업 분야의 기계화는 노동과 노래를 분리시켰으며 결국 노젓는소리 대신 어선의 발동기 동력선의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결국 노동요 역시 일부 가창자로 제한되었고, 해녀노래에서나마 해양문화로서의 어업노동요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제주특별자치도 무형유산인 해녀노래는 바다에서 물질 작업을 하던 해녀들에 의해서 불려진 어업노동요다. 제주의 해녀는 일반적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 마을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해녀들은 밭에서 농사를 짓고, 물때가 되면 바다로 나가 전복이나 해삼, 소라, 톳, 천초 등을 채취해 생업을 이끌어갔다. 제주에선 해녀를 ᄌᆞᆷ 수, ᄌᆞᆷ 녀, ᄌᆞᆷ 녜, 잠수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블라디보스톡까지 바깥물질을 나갔다. 전 세계적으로 해녀는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와 일본의 일부 지방에 존재하는데 그래서 제주를 해녀의 발상지로 보기도 한다. 아울러 제주의 해녀들만이 역동적인 해녀노래를 불렀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해녀노래는 크게 배의 노를 저으면서 부르는 노 젓는 소리와 테왁을 짚고 바다로 물질 작업을 나가면서 부르는 테왁 지펑(짚고) 휘어가는(헤엄쳐 가는) 소리로 구분된다. 해녀들은 그들의 정서를 노래 속에 담아냈다. 배에 노를 저으면서 또는 테왁을 짚고 바다로 물질 작업을 나가면서 물질 작업이 다 끝나고 흥겹게 놀 때도 노래를 불렀다. 해녀노래의 명칭은 마을마다 다르지만 보통 네젓는소리, ᄌᆞᆷ 녜소리, ᄌᆞᆷ 수질소리, 이여싸소리, 이여도사나라 부른다. 선후창 형식으로 구성된 해녀노래는 주로 배의 노를 젓는 사람이 선소리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이여싸나, 이여도싸나라는 후렴을 받거나, 선소리를 부른 사설을 따라 부르기도 한다. 또는 교환창 형식으로도 노래가 구성되는데, 각자 다른 사설을 한 소절씩 연이어 부르기도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노래해야 하기에 한 사람이 계속 선소리를 하는 것이 힘들기에 다른 사람이 교대하여 선소리를 부르기도 하고, 또는 각자 제 사설을 부르기도 하는 등 선후창과 교환창이 혼합된 방식으로도 불린다.

해녀노래는 물질하는 여성의 삶의 반영으로서, 제주 여성의 상징으로서 해녀들의 희로애락, 그리고 극복의 의지를 담고 있다. 제주 해녀들은 험한 노동으로 인한 고통을 노젓는 기백으로 극복하였다. 그래서 노래는 삶의 역동성과 힘찬 기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해녀노래는 발동선이 생긴 1970년대 이후 노동 환경이 바뀜에 따라 노래의 현장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주 전역에 남아 불려지고 있다.


해녀노래

이여싸나 이여싸나
이여싸나 이여도싸나
밋밋ᄒᆞᆫ 물절에
해풍만 치고요
허적소리 나는것은
연락선만 소리로구나
져라쳐라 쳐라베겨라
ᄒᆞᆫ목을젓엉 남을준덜
허리야지덕 배지덕말라
놈의나고대 애기랑배영
허리야지덕 배지덕 말라
우리어멍 날날적에
가시나무 몽고지에
손에궹이 벡이라고
날났던가
이여싸나 이여싸나
요벤드레 끊어나지면
부산항구 아사이노가
없을소냐
요네착이 부러지민
대마도산천 곧은남이
없을소냐
ᄆᆞ를ᄆᆞ를 신살루멍
젓어보라
기신내영 발버둥치건
ᄆᆞ를ᄆᆞ를 ᄆᆞ를을지라
이야차 어기여차
간다더니 왜왔더냐
울고갈길 왜왔느냐
요금전이 아니라면
울산강산이 어딘줄알앙
부모형제 떨어두곡

어린자식 정둘롸두언
새벽밥ᄒᆞ멍 불ᄉᆞᆷ 아보라
쳐라쳐라 쳐라베겨
ᄒᆞᆫ목을젓엉 놈을준덜
ᄆᆞ를을주랴
만리나장성 벋은닷을
ᄌᆞᆷ ᄌᆞᆷ 이 사려놓고
어기야차 소리에
배만 올라 가는구나
이여싸나 이여싸나
삼돗ᄃᆞᆯ 앙 배질ᄒᆞ기
선주사공 노념이여
붓대심엉 글잘씨긴
서울양반 노념이여
사람마다 베실을ᄒᆞ면
노숙자가 어디시멍
의사마다 벵고치민
공동묘지가 왜생기나
쳐라저어라 저어라
ᄆᆞ를ᄆᆞ를 젓엉가게
앞의배를 냉기치자
우리성제 삼형제가
들어사난 네도맞고
등도맞아 백만서가
다맞아지네
이여싸나 이여싸나
가다나오다 만난님은
정으로나 살건마는
예문예장 드린님은
법으로나 사는구나
이여도사나 쳐라쳐라
ᄒᆞᆫ목젓엉 남줄네에

열두씬뻬 실랑거령
자리야잘잘 가는구나
이여도사나
잘잘가는 잣나무배가
솔솔가는 솔나무배가
우리야배는 ᄎᆞᆷ 매새끼
ᄂᆞ는듯이 자리야잘잘
가는구나 이여도사나
요네녹지 밤바다에
파도가들엉 궁글리곡
자그마한 여자의마음
황금이들엉 궁글리네
이여도싸나 이여싸나
요물아래 은과금은
ᄁᆞᆯ 렷건마는 높은낭긔
열매로구나
우리배에 선주사공
뱃머리만 돌려주소
우리젓는 젓거리로
지붕이도 상ᄆᆞ를이여
바당이도 물ᄆᆞ를이여
요밧안에 ᄆᆞ를없이
ᄆᆞ를ᄆᆞ를 신살루멍
이여싸나 이여싸나
쳐라디어 어기여차
ᄒᆞᆫ목지고 남줄네에
허리야지덕 배지덕말라
돈아돈아 말ᄆᆞ른돈아
개도쉐도 안먹는돈
창고망도 못ᄇᆞᆯ르는
돈이로구나

노젓는 노동 자체가 상당히 역동적이기 때문에 이 민요도 매우 율동적이며 힘차고 박진감 있게 전개된다. 사설 내용은 해녀 노젓는 노동과 관련된 내용이 상당히 많으며, 실제로 물질하는 모습, 물질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한 생활환경, 험한 삶에 대한 인생의 허무함, 시집살이의 어려움 등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해녀노래는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기능보유자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동김녕리 정순덕(여, 1918년생) 씨를 지정하였고, 문화재명은 해녀노래이다. 이후 1998년 정순덕의 사망으로 보유자가 없다가 2000년 8월 2일 구좌읍 행원리에 거주하는 안도인이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2004년 안도인의 사망으로 2005년 4월 6일 구좌읍 행원리에 거주하는 강등자(여, 1938년생)와 김영자(여, 1938)가 보유자로 지정되어 전승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보유자 강등자‧김영자, 전승교육사 고연옥‧안미선‧강경자, 이수자 임옥희, 김옥희 외 전수장학생 7명, 일반전수생 6명 등으로 전승체계를 확립하고 행원리에 자체적으로 마련한 해녀노래전승관을 중심으로 전수교육을 전개하고 있다. 아울러 해녀노래전승보전회가 조직되어 일반인을 대상을 해녀노래 전수교육활동을 실시하고 있으며, 대외 활동으로 해녀박물관 상설 공연, 탐라문화제 및 무형문화대전 시연 등을 통해 해녀노래 전승 보전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