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돌굴리는노래

방앗돌 굴리는 노래는 마을 사람들 여럿이 모여들어 방앗돌을 마을로 운반하면서 부르던 노래로 잡역노동요이면서 운반노동요로 분류된다.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전승되어온 방앗돌 굴리는 노래는 마을 사람들 여럿이 모여들어 방앗돌을 마을로 운반하면서 부르던 노래로 잡역노동요이면서 운반노동요로 분류된다.

제주 사람들은 예로부터 화산섬이라는 척박한 환경과 아픈 역사에 굴하지 않고 때로는 맞서면서 때로는 순응하면서 생존의 지혜를 펼쳐왔다. 제주민요는 제주 사람들이 환경을 극복해 옹골찬 삶의 반영이자 역사이다. 척박한 환경을 일구어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숨을 토해내듯 불렀던 제주민요는 단순한 노래가 아닌 제주 사람들의 삶의 질곡을 엮은 대서사시인 것이다. 그래서 제주민요는 일할 때 불렀던 노동요가 풍부한 반면, 창민요는 많이 전승되고 있지 않다. 농사일을 하면서 부르는 농업노동요, 고기잡이나 해녀들이 물질을 하면서 부르는 어업노동요, 그밖에 방앗돌을 굴리거나 불미 작업을 하면서 불렀던 잡역노동요로 분류되는데, 잡역노동요 중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에서 전승되는 방앗돌 굴리는 노래가 제주특별자치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노래와 함께 작업 실태가 전승되고 있다.

일찍이 제주 사람들은 조나 보리, 잡곡 등 수확한 곡식의 껍질을 벗길 때 연자매를 사용하였다. 연자매는 ‘ᄆᆞᆯ방에’, ‘ᄆᆞᆯᄀᆞ레’라고도 하는데, 알돌인 판 위에 웃돌이 얹힌 것으로 웃돌이 굴러가는 동안 곡식의 알갱이가 떨어지고 찧어지며 빻아지게 되는 것이다.

방앗돌 굴리는 노래는 연자매의 웃돌과 알돌을 산이나 바닷가, 들판에서 제작한 다음 마을 사람 여럿이 동원되어 마을로 끌어오면서 부르는 운반노동요로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주에서만 유일하게 전승되는 노래이다. 이처럼 먼 들판이나 산에서 만들어진 방앗돌을 마을까지 운반해 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마을 사람 대부분이 함께하는 집단적인 노동이었기 때문에 규칙적인 작업 동작과 협동심이 필요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선소리를 하면서 힘을 돋우면 나머지 일꾼들은 “어기영차”, “어기영차”하는 후렴과 함께 힘을 모아 일시에 줄을 메어 당기는 식으로 방앗돌을 굴려 나갔다. 이러한 선후창의 가창 형식은 동작의 일치와 함께 힘을 모으는 역할을 하였다.


마을까지 오는 동안 겪게 되는 험한 노동이 노랫말에 잘 나타나고 있으며, 서로 힘을 내도록 권하는 제주 사람들의 단결력을 느낄 수 있다. 강원호 씨가 부른 방앗돌 굴리는 노래를 들어보자.

어허 역군님네 멧날 메칠 걸려 멘든 방앗돌을
우리 ᄆᆞ을로 굴려 갑시다.
야~
오호오 오호오 어허어 굴려 가는 소리
어기영차
길을 다까근 어허어 짊어ᄃᆞᆼ 기는 소리로구나[짊어져 당기는 소리로구나]
어기영차
꼬불꼬불 오호오 깊은 골짝
어기영차
활등같은 오호어 곱은 길로[활등처럼 굽은 길로]
어기영차
쌀대같이[화살대처럼] 오호오 날아든다
어기영차
호 어허어 오호오 ᄒᆞᆫ치두치 내수아가는고[앞으로 나아가는구나]
어기영차
앞엔 보난 오호오 험한 동산이 있구나
어기영차
이 동산을 오호오 어떻게 넘을꼬
어기영차
호오오 어허어 오호오 역군님네 힘을 내어봅시다
어기영차
천년만년 오호오 자던 돌도
어기영차
오늘날은 오호오 쓸모가 있구나
어기영차
호오오 오호오 ᄒᆞᆫ치두치 내수아가는고
어기영차
ᄒᆞᆫ치두치 내수단보난 오호오 알벵이돌[아랫돌]도 다 들어가는고
어기영차
일락서산에 오호오 해는 다 저물어 가는고
어기영차
우리의 갈 길은 오호오 얼마나 남았느냐
어기영차
호오오 호오오 어허어 역군님네 힘을 내어봅시다
어기영차
한라산으로 오호오 내리는 물은
어기영차
낭썹[나뭇잎] 썩언 오호오 내리는 물이로구나
어기영차
요내 몸으로 오호오 내리는 물은
어기영차
오장육부 오호오 썩어 내리는 물이로구나
어기영차
호오오 오호오 웃벵이돌[윗돌]도 다 들어가는고
어기영차
호오오 오호오 ᄒᆞᆫ치두치 내수아가는고
어기영차
ᄒᆞᆫ치두치 내수단보난 오호오 웃벵이돌도 다 들어왔구나
어기영차

무거운 연자매를 만들어 마을로 끌어오면서 불렀던 방앗돌 굴리는 노래는 이제 정미소가 생기면서 전승의 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안덕면 덕수리 허승옥(남, 1903년생)의 진술에 의하면 덕수리에서 방앗돌 제작은 거의 200년 전에서부터 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덕수리에는 연자맷간[ᄆᆞᆯ방엣집]이 13개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연자매는 평균 30가구마다 1기씩 제작하고 설치하여 운영하는데, 연자매를 운용하기 위한 조직으로 ᄆᆞᆯ방이접, ᄆᆞᆯᄀᆞ레접과 같은 계 조직이 있어서 운용 경비를 마련하고 노력 부담을 했었다.

방앗돌 굴리는 노래의 전승의 맥을 이어준 것은 허승옥이다. 허승옥은 방앗돌 굴리는 노래뿐만 아니라 불미노래까지 잘 부르던 소리꾼이었다. 허승옥은 방앗돌 굴리는 노래를 일제강점기 때 모슬포에 비행장을 만든다고 대대적인 노력 동원을 했었는데, 그때 안덕면 서광리의 김남석(허승옥보다 10년 연상)이 부르는 것을 듣고 배웠다고 한다. 허승옥이 부른 방앗돌 굴리는 노래의 사설 내용은 일관되게 방앗돌 굴리는 작업 실태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후렴도 홍애기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어야 홍”으로 불렀지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출연을 계기로 “어기영차”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1980년 개최된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계기로 소멸 직전에 놓였던 방앗돌 굴리는 노래는 허승옥에게서 강원호에게 전승되었다. 당시 81세였던 허승옥은 고령으로 숨이 벅차고 선소리를 이어 부르기가 힘겨웠다. 이에 젊고 성대가 좋은 강원호(남, 당시 52세)가 허승옥에게서 배우고 전국민속경연예술대회에 출연하여 직접 선소리를 불렀으며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후 방앗돌 굴리는 노래는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 1986년 4월 10일 제주특별자치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때 1대 보유자로 허승옥(남, 1903년생)이 인정되었다. 허승옥은 발굴할 당시 이 노래를 유일하게 전승하고 있었던 소리꾼으로 당시 고령으로 가창 능력이 다소 떨어지긴 했으나, 방앗돌 제작에 따른 민속 지식과 기능을 갖추고 있었던 점이 높이 평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94년 9월 30일 자로 강원호가 방앗돌 굴리는 노래 2대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2008년 1월 10일 자로 김영남 (남, 1952년생)이 소리의 기량을 인정받아 3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 당시 김동윤은 전수교육조교, 강명언은 전수 장학생으로 지정되어 전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2009년에는 구복희(여, 1956년생)가 전수 장학생으로 추가되었으며, 2020년에는 강명언(남, 1958년생)이 전수교육조교로, 김애란(여,1950년생)이 전수 장학생으로 추가 지정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방앗돌 굴리는 노래는 제주특별자치도 무형유산으로 재지정되어 있다.

방앗돌 굴리는 노래는 작업 실태뿐만 아니라 무거운 돌을 운반하면서 힘을 모으고 서로 힘을 내도록 권유하며 협동하는 공동체 집단의식이 담겨있다. 또한, 다른 지방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운반 노동요로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