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개관
제주도 내 구석기시대 유적은 빌레못 동굴유적과 천지연 유적이 대표적이다. 2009년 국립제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천지연 생수궤유적에서는 후기 구석기 시대 유물인 좀돌날, 돌날, 잔손질석기, 신석기시대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제주시 삼화지구에서 출토된 뗀석기, 외도동 운동장 부지에서 출토된 찍개, 한림읍 동명리에서 수습된 소형 석기류, 서귀포시 체육시설 부지에서 출토된 석기류 등이 확인되면서 제주도 구석기시대의 면모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제주도 신석기시대 유적은 초기로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며 해안지역뿐만 아니라 중산간 지대에서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신석기시대 초기 대표적인 유적은 고산리 유적(1998년 12월 23일 사적 지정)이다. 고산리 유적에서는 구석기시대 후기의 눌러떼기 수법으로 제작된 석기가 집중 출토되었다. 석촉 등 첨두형 석기(화살, 창)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갈돌과 갈판, 어망추 등도 출토되었다.
또한 한반도에서는 확인된 바 없는 원초적인 토기가 발굴되었다. 식물줄기와 같은 섬유질 보강제를 섞어 성형해 소성한 뒤 그 자국이 남아 있는 토기이다. 이러한 섬유질 토기 형식은 연해주와 일본의 신석기시대 초기 또는 죠몬 시대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이와 비슷한 유물은 구좌읍 김녕리, 서귀포시 예래동, 표선면 성읍리, 제주시 오등동, 삼양동, 외도동 등지에서도 출토되었다. 1만~8천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유적이다.
고산리 유적에서 나온 또 다른 유형의 토기는 덧무늬(융기문)토기로 1988년 해안가 절벽 위 퇴적층에서 1개체가 확인되었다. 융기문토기 문화는 신석시시대 전기(B.C 4,500~B.C 3,500년)에 해당하는데, 관련 유적으로는 현재까지 고산리 동굴유적, 성읍리 유적, 온평리 유적, 사계리 유적 등이 알려져 있다.
제주도 청동기시대는 전기와 중기로 나뉜다. 전기는 공렬토기 문화로 대표되며 대정읍 상모리 유적과 제주시 삼화지구 유적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상모리 유적의 공렬토기는 유입 때로부터 제작 성행, 퇴화 단계까지 토기들이 확인된다. 토기 사용자들이 이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이 유적의 패총에서는 토기와 석기뿐만 아니라 전복, 소라 등의 껍데기와 동물 뼈들이 확인되어 당시 주민들이 해산물 채취 등 어로 행위, 수렵을 통한 식량 자원 확보에 주력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중기는 원형의 송국리형 주거지가 나타나고 외반구연토기가 사용되던 시기이다. 이 시기 후반에 집단 취락이 생겨난다. 이러한 주거지는 삼양동 유적, 고산리 유적 등에서 확인된다. 이 시기 무덤 형태는 고인돌[지석묘支石墓]로 제주에는 100여 곳이 남아 있다.
제주도 철기시대[주호시대, 탐라 여명기]는 본격적인 농경 문화를 기반으로 마을이 이루어지고 위계적 사회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삼양동 유적을 비롯하여 화순리 유적, 예래동 유적, 강정동 유적, 용담동 유적에서 대규모 마을이 확인되며 제주도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기원 전후한 시기의 대외교류 흔적으로 청동검과 검파 두식, 동촉과 옥환 등 외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산지항에 서 출토된 동경과 중국 화폐 등의 유물은 옛 제주가 낙랑, 삼한지역과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한-낙랑-삼한-왜로 이어지는 교역로에 제주가 적극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만들어진 제주산 토기가 전라남도 나주와 해남, 경상남도 늑도 등에서 확인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조에 기록된 주호州胡는 3세기 이전의 제주를 부르는 명칭이다. 제주를 가리키는 최초 기록인 주호는 “마한馬韓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곳 사람들은 키가 작고 말도 한韓과 같지 않다. 그들은 모두 선비족처럼 변발이었으며, 가죽옷을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중한中韓과 교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 문헌
고재원 외 5명, <제주도 고고학의 어제와 오늘>, 《계간 한국의 고고학》 33호, 주류성출판사, 2016.
필자
고재원(高才元)